[부산―멜로드라마]


이번호에서는 부산영화제에서 선보인 영화 세 편을 가지고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 영화들은 영화제에 다녀온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공개되었고 이후 개봉이 의문 시되는 바 여러분이 공감할 수 있는 측면이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언젠가는 볼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며(적어도 이 글을 관심 있게 읽으시는 분들이라면 말이죠) 시작해 보지요.

이번의 부산은 성 담론의 홍수를 겪었습니다.
부산 영화제는 올해 신설된 여타의 부속 프로그램을 제하고 말한다면, 최근 해외에서 각광 받은 영화들의 축제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관객들이 보통 때 같으면 기존의 검열과 상업적 계 산이라는, 영화 선택과 관람에 있어서의 이중 장벽을 넘지 못할 다양한 영화들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기회인 셈이지요. 그리고 이번에 선택된 영화들 중 대다수가 소재적 측면에 있어서나, 그 담론의 정치적 함의에 있어서나 언제나 변함없이 각광받고 있으며 또한 현재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성'을 전면적으로든 선정적으로든 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 했습니다. 단적으로 '신선한 육체', '달콤한 타락', '타락과 쾌락', '호색한', '육체의 학교' 등등 현란한 제목에서도 알다시피 음미할 수 있는 육체와 성의 풍성함이 그 어느 때 보다 두드러졌습니다. 그 리고 자연히 '시네-페미니즘'의 시각을 자극하는 영화들이 많았지요.

이 세 편을 뽑은 데 무슨 근거가 있냐고요? 읽어보면 아십니다. (모를 수도 있죠.)

1. 여성 감독이란 이유만으로

언제부턴가 시네-페미니즘 안에서는 여성 감독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영화 제작판에서의 성차별 문제를 논하는데서부터, 창작, 재현의 주체로서 감독이 차지하는 위상이 절대적인 것처럼 인식되면서 감독의 젠더가 영화 안 성정치 담론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전제하에 여성 감독과 텍스트 안 담론과의 상관성을 살펴보는 데까지 '여성 감독'이란 화두는 다양한 논의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마침 올 부산 영화제 기획 프로그램 안에는 "이중의 장벽 : 아시아에서 여성 감독이 된다는 것은" 부분이 이 있더군요. 하지만 이 기획은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못해 생산적인 논의 형성 기회가 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관객으로서 한번 비판해 볼까요? 이 프로그램에서 상영된 영화 '밀라그로스'(1994,필리핀, 마릴로우 디아즈아바야)를 보도록 합시다.

이 영화는 위와 같이 아시아-여성-감독이란 카테고리를 차용함에 있어 그 의도가 매우 피상적인 데 머물렀음을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90년대 필리핀 판 호스테스 영화였는데 문제는 영화 내 여성 주체에 대한 시선을 새로이 조명하려 했을른지는 몰라도 형식을 그에 맞추어 제대로 꾸려내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문화적으로 근접하지 않은 지역인 필리핀 영화를 보면서 지독한 상투성을 느꼈다는 것이 놀라웠을 뿐이지요.

줄거리를 이야기해 볼까요?
어머니와 함께 매춘업을 하고 있는 밀라그로스란 스트립댄서 겸 창녀는 과거 자신과 어머니를 상습 폭행하고 급기야 딴 살림을 차리고 나간 군인 아버지의 부음 을 전해 듣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진 빚을 대신 갚기 위해 아버지 친구인 채권자 집에 하녀로 들어가지요. 그녀는 스스럼없이 주인에게 온몸으로 맛사지를 해주고 정신 박약 막내와 옷을 벗기고 몸을 부대끼며 노는 등 진심으로! 봉사를 합니다. 그런 그녀를 이 집 장남은 사랑하게 되고, 동시에 차남은 그녀의 과거를 들어 강간하고 쫓아내려고 하지요. 장남의 경우 부유한 부인을 잃기 싫어서 그와의 관계를 부인에 말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폭행합니다. 이런 비극의 가운데 그녀를 유일하게 감싸주던 주인이 숨지고 아니나다를까 그녀 또한 백혈병에 걸려 죽어갑니다. 그녀는 몰래 병원을 빠져나와 혼자서 어릴적 아버지가 그녀와 함께 갔던 산꼭대기를 찾아가고 숲속에서 미군의 오발탄에 맞아 죽게 됩니다. 죽어가는 그녀 앞에는 그녀를 데리러 오는 군인 아버지의 환영 이 어른거립니다.

믿겨지십니까?
제 관점이 편중되어 이런 무지막지한 줄거리가 나온 것일까요? 이를 들여다보면 70년대 중 반부터 우리 땅에서 꽃 피웠던 <별들의 고향>류 그리고 <노는 계집 창>으로 90년대 까지 존속한 호스테스 영화와 다를 바가 없지요? 한 여리고 착한 여자가 여러 남성들의 배신과 학대로 인해 호 스테스가 되고 이후 허무함에 유일하게 안락함이 떠오르는 공간인 고향을 찾아가다 죽게되는 이야기 말입니다. 단지 다른 것은 밀라그로스는 매춘부라는 직업에 그리 큰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인데 그녀의 어머니는 심지어 신부님 앞에서 "신은 우리편입니다." 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 일생이 백혈병으로 끝나갈 즈음 어머니는 신께 죄를 빌게 됩니다. 더구나 밀라그로스는 이러한 어머니와의 세계를 떠나 환상 속에서나마 위풍당당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지요.

멜로드라마 장르에서 굳어진 과잉된 학대와 피해의식들의 향연이라고 할까요?
아무리 영화 안의 숨겨진 함의를 찾아보려 노력해도 장르의 닫혀진 벽은 너무나 두텁더군요. 여성 감독, 여성 인물, 화자의 영화로 영화 텍스트 내외 담론 형성 주체가 여성이라고 해도 그들이 자신의 언어의 어느 장소에 위치하여 권력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란 문제에 있어 능동적이고 의식적이며 또한 생산적인 계기를 마련치 못한다면 기존의 담론을 여성의 입장에서 재생산하는 결과가 되겠지요.

그러면 멜로 장르에 부합하는 네러티브를 가지고서 잘 요리해 들어가 새로운 결과를 이끈 대안적인 영화들을 살펴 봅시다.

2. 육체 학교의 과제 : 장르-전형의 젠더 바꾸기

앞서 말한 부산 영화제-육체와 성에 관한 향연에 제목마저도 기여한 여러 영화 중 흥미를 끈 것은 '육체의 학교' (프랑스, 1998, 베노 자끄)였습니다. 제목에 걸맞게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동일시와 도취에 의한 무의식적 감상에서 벗어나, 스스로도 의식적인 두뇌 작용-학습을 하도록 종용받습니다. 이는 영화가 기반으로 하는 장르-멜로드라마에 가한, 지극히 단순한 변형만으로도 가능했습니다. 즉, 인물 전형 간의 젠더를 바꿔보는 것이지요.
전문직을 지닌 중산 계급 이혼녀 도미니끄와 어머니와 동생을 몸을 팔아 보살피 는 어린 남창 퀜틴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이 영화는 바로 이 불륜과 물신주의에 의한 계급 상승에의 욕망, 신분 차를 넘은 젊은이의 사랑과 이에 대한 억압 등등에 얽혀 진행되는 멜로드라마 네러티브 상의 장치에 모두 파격을 가하며 전개되어 나갑니다. 물론, 성 모럴과 이의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억압기제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다고 확신하는 문화 안에서 만들어 내는 스타일의 힘도 크지요. 하긴 학교란 모든 부자연스러운 것들이 당연할 수 있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공간이니까 어쨌든 이로 인해 텍스트 안에서는 전도된 젠더에 대한 의도성 조차도 희석됩니다.
이를 의식하는 것은 우리-관객이지요.

도미니끄는 퀜틴에 집착하면서 서서히 물질적인 공략을 펴나가고 퀜틴은 상층 계 급의 또래를 만나 그 부모까지도 감동시키면서 결혼을 성사시키고자 합니다. 이 결혼에 반대하는 도미니끄에 양해를 구하는 그녀의 부모들은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모든지 할 수 있으며 남창인 과거를 솔직하게 말하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든다고 말합니다. 이에 도미니끄는 복수를 하려고 하지만 결국 그를 내주고 그런 그녀의 행동에 감화 받은 그는 그녀 곁에 머무르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떠나고... 몇 년 후 그녀는 거리에서 여관업을 하면서 도미니끄란 딸을 키우는 아버지인 퀜틴을 만나게 됩니다.

대개의 멜로드라마 이야기 전개에 작용하는 애욕과 물신주의 그리고 로맨스적 사랑이라는 세 개의 축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상충된 갈등 구조를 이룹니다. 이것은 애욕의 드라마에선 과잉된 집착과 복수심, 그리고 죄의식을 낳으면서 파국을 향해 가고, 세 축의 갈등이 로맨스에 의해 갑작스레 해소되면 '프리티 우먼'류의 코미디가 등장하는 것이고요. 그러나, 이 영화는 세 축 중 어느 한가지로 치우치지 않은 평정 상태로 귀결됩니다. 퀜틴은 신데렐라가 되길 포기하고 도미니끄는 새사람을 찾지요, 이 모두 외부의 억압이기보다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평정으로의 귀결은 계속되는 도미니끄의 '눈물'에 의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하게됩니다. 감정과 욕망에 대한 집착 또는 혹독한 자기 억압의 극단에서 방황하는 애욕의 남성 전형에 비해 그녀는 소위 여성성이라고 인식되는 즉각적인 감정의 발산을 가능하게 하는 이 정교한 조정 수단을 가지고 있었고 이로 인해 위와 같은 결말이 가능했다는 거지요.

3. 자기 반영의 무한 증식 : "도대체 이게 뭐야?"

<도대체 훌리엣이 누구야?>(1997, 멕시코, 카를로스 말코비치)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들겁니다. 등장 인물은 모두 본명을 쓰고 있으며 인터뷰를 기반으로 하지요. 다큐일까요? 그건 모를일 입니다. 촬영 스탭들도 영화 공간으로 불려들어와 훌리엣의 꾸중을 듣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연출해 보기도 하고 자신은 감독과 과연 잤는가 안잤는가 등등 관객이 떠올릴 수 있는 잡생각들을 스스로 던져줍니다. 훌리엣의 이야기와 상관없는 어떤 아저씨가 계속 첩보전하듯 어색하게 가방을 들고 숨어다니는가 하면, 인물들은 영화가 잘될지 아닌지에 대해 언쟁하기도 합니다. 어지간히 요란한 이 영화에 어리둥절한 관객들은 훌리엣의 가정 비극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 황당한 전개 형식에 더 큰 반응을 보이지요. 즉, 영화 스스로 만들어내는 아이러니의 연쇄속에 서 관객은 일정한 사연에 동화되지 않게 됩니다.


그 사연이 뭐냐고요? 이 쿠바 소녀 훌리엣이 두 살 때 아버지는 훌쩍 미국으로 떠나고 어머니는 분신 자살합니다. 그 후 할머니 밑에서 큰 그녀는 14살인 지금 모델 에이젼시 눈에 들어 라틴 계 수퍼 스타의 뮤직 비디오에 파비올라란 모델과 출연했고 이를 본 아버지와 연락이 되면서 이해를 구하는 아버지와 용서하지 못하는 딸 간의 간극이 점차로 좁혀지는 과정을 그린 것이지요. 정말, 눈물의 가족 멜로에 손색이 없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자기 반영적인 틀(이 영화 보시는 분들~ 이럴 줄 나는 이미 안다네!)이 중첩되면서 몰입의 여지는 사라집니다. 어떤 책에서는 이를 압축 재현이라고 하지요. 결론을 질러가고 반응을 질러가고. 영화의 과감한 무단 횡단인 셈이죠.

발칙한 훌리엣의 행동과 대사들도 그야말로 압축 재현적 입니다. 그녀는 모델의 길로 들어설 지도 모를 기로에서 "이 세상에 또 하나의 창녀가 나가신다!" 라고 소리칩니다. 감독하고 누가 잤 는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그녀의 이제까지 성관계 이야기에서도 과잉 노출에 장난기까지 가세해 '여배우, 모델, 제 3세계 어린 여성' 할 때 흔히 일어나는 관객의 머릿 속 내숭을 앞서 공략하지요. 성에 대한 관점도 도발적입니다. 꼬마 사촌 동생에게 긴 키스를 하고선 "어머 자기 섰어! 하지만 안돼. 난 네 사촌이니깐"이라고 장난을 치니 말이죠. 관객석에선 '허허...'하는 소리가 종종 들렸답니다.

비련이란 보는 이의 것일 뿐. 거리낌없는 그녀의 유쾌함에는 생명력이 넘칩니다. 자기의 환경이나 굴곡에 대해 한없이 응축해 들어가며 순결한 사랑에 대한 강박과 이것을 잃은 데 대한 수치심 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 보다는 앞질러서 차라리 그래 고작 창녀라고 보는 거지! 라고 일소하며 아이러니를 만들어가는 것이 건강한 삶의 방식, 재현의 방식이겠지요.

너무 주저리 주저리했군요.
"이번에는 관습의 파기, 영화 형식 상의 아이러니와 압축 재현 등등 관객과 무의식적 공범관계를 맺기보다는 의식적 거리 두기를 통해 새로운 보기를 개척해 가는 영화 경향을 살펴보았다"고 정리하면 수긍하시겠습니까?

다음호부터는

  • 재현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력에 확신하십니까?'
  • 영화 안 주체-화자 구성 방식과 주체의 기능은?'
  • 영화 텍스트와 관객 관계의 매커니즘은?' 등등


후후, 듣기만 해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책표지가 어른거리는 이 거창한 의문들을 느긋하게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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