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여성으로의 경험

설 탕



   정확히 몇년도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 사건은 내가 대학생일 때, 그것도 학교에 가는 동안에 발생했다. 학교를 가기 위해선 이대 입구 역에서 내려야 했던 나는, 공교롭게도 집이 정반대편인 종합운동장 역 근 처였기 때문에 매일같이 지하철 2호선을 반바퀴씩 돌아야 했다.
   그 날은 설날 연휴 중 하루였다. 왜 설날 연휴에 학교를 가는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친척들이 모두 서울에 살고 있는 나같은 학생 들은 설날 외의 다른 날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꽤나 많은 학 생들이 학교에 모여서 놀 거리를 궁리하곤 했다.
   해마다 명절 때면 그렇듯이, 그 날도 지하철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기 껏해야 한복을 입고 선물 꾸러미를 들고 탄 가족이나 설날 개봉 영화를 보 기 위해 탄 젊은 남녀 몇 쌍이 전부였다. 그러나 잠실역이 되니 사정은 달 라졌다. 잠실역. 이 곳은 롯데 백화점을 비롯 각종 상권, 유흥 시설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항상 많은 사람들이 탄다.
   안내 방송에 이어 지하철의 출입문이 열리자 우루루 사람들이 몰려 들어왔 다. 그리고 아이를 안은 젊은 부부 한 쌍이 내가 앉은 자리 앞에 섰다. 여 자 남자 모두 한복 위에 두루마기를 곱게 차려 입고 있었고, 그녀가 안고 있던 아이는 2살 정도 되어 보였는데 역시 색동 저고리와 파란 조끼를 입 고 있었다. 예상컨대 이 가족도 어딘가 친척집에 선물을 사 들고 가는 길 인 듯했다.
   사건은 그 때부터였다. 지하철을 타자마자 부부는 숨돌릴 틈도 없이 말싸 움을 하기 시작했다. "일 년에 한 번 가는 건데, 꼭 그래야 돼? 내가 당신 이 이런 사람인 줄 알았으면 결혼 안 했어. 정말이야". "내가 뭐 어쨌다고 그래? 누가 들으면, 내가 우리집만 챙기고 처가댁은 무시하는 사람인 줄 알겠다". "무시하는 거지, 그럼 무시하는 게 아니고 뭔데?". "내가 언제 무 시를 했다고 그래?". "자기 집에는 한 달에 한 번은 가잖아. 그리고 갈 때 마다 어디 빈 손으로 가? 내 친구 남편들은 처가집이 더 편하다고 자꾸만 가자고 그런다더라". "어휴, 이 사람아. 그런 말을 믿니? 다 듣기 좋으라고 그런 말 하는 거지.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장인 장모가 어디 사람 이 가면 반겨주기나 해?"
   여자는 열이 점점 오르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여자는 안고 있던 아이를 내 게 건네면서, "미안한데, 잠깐만 아이 좀 안고 있어봐요"라고 말했다. "네? 아, 예." 나는 엉겹결에 아이를 받았다. 다행히 아이는 순해서 내게 안겨 있어도 울지는 않았다. 그러나 솔직히 난 곤혹스러웠다. 아이는 미끌미끌한 한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자꾸 아래로 미끌어져 내렸고, 도령 모자를 벗 으려고 손을 흔들어댔다. 연한 입술 밖으로 침이 흐르는데, 손수건이 없었 던 나는 맨손으로 닦아서 내 옷에 문질어야만 했다. '으. 이게 도대체 뭐 람.'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은 모두 나를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싸움에 몰두하고 있던 아이 아빠나 엄마는 나와 아이에겐 별로 관 심이 없었다. 그 다음에 부부의 싸움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 는다. 그 부부는 성수역에선가, 하여간 얼마 가지 않아서 내렸다. 내게서 급하게 아이를 뺏아 안은 채.

[이소리 글모음  |  달 딸 목 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