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생애를 거쳐 온 그녀의 이름, <자스민>

 

정 서 경/ 여 해 그 림

     '바라티 무커르지' 라는 작가의 이름을 분명히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그래서 도 서관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들춰봤지만 그녀에 대한 정보를 찾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필요한 책을 찾는데 미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아직 젊고 그의 작품이 발표되는 중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도서관이 충분히 부실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러나 처음부터 나는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무커르지는 인도 출신의 귀화한 미국인이 며 여성 작가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작가는 이 소설이 미국에서 들끓고 있는 '이민 논의'의 한 가운 데에서 토론의 대상이 되어 왔다고 쓴다. 작가에게 <자스민>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조 국 대신에 어떤 한 외국에 소속되기로 자의적으로 택하는 행위인 '이주'에 관한 이야 기이다. 인도의 전통 사회에서 신대륙 미국으로 이주하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과 저자 는 북아메리카에서 인종적, 종교적, 언어학적 이국인으로 살아왔던 체험을 공유하고 있다.

     영문학 분야 서가에서 이 책을 골라낸 한국인 여성 독자인 나에게 <자스민>은 무엇 보다도 여성의 성장 소설로 읽힌다. 20-30년대에는 만주와 일본으로, 70-80년대에는 미국, 호주, 캐나다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이민'보낸'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 에는 많은 외국인 노동자를 '불법체류' 형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 이주' 혹은 '이민'의 문제는 아직 보편적인 이슈가 아니다. 작가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많은 아시아 사회들이 이주 과정 전체를 너무도 괴상한 것으로 여기는 까닭에 미국 적 의미에서의 'immigrant'를 뜻하는 단어조차 갖고 있지 않다"며 "이러한 언어학적 상태가 한국에도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을 표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 도 새로운 사회로 떠나면서 이전의 삶들을 뛰어넘어 가는 여성에 관한 소설인 <자스민 >은 분명 보편적인 울림을 가지고 있다.

     남자들은 떠나고 여자들은 머문다. 오래된 역사적 관례이고 문학의 관습적 이미지 이다. 율리시스는 떠나고 페넬로페는 기다린다. 배에 올라탄 남자들의 눈은 보이지 않 는 지평선 저쪽을 향하고 있으며 여자들은 항구에서 그러한 남자들을 향해 눈물젖은 손수건을 흔든다. 신대륙으로 떠나는 콜롬부스의 배에는 모험가 여성이 타고 있었던가 ?

     어째서 여자들은 떠나지 못하는가? 어째서 미국, 호주, 뉴질랜드로 가는 배에는 남 자들이 많고, 서부 영화에는 남자들이 많이 나오고, 한국에서는 나이를 충분히 먹어도 시집가기 전에 집을 나와 혼자 사는 여자가 그렇게도 드문가? 그것은 여자들의 발에 관습이라는 전족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험가를 많이 낳는 사회는 도덕이 불안정한 사회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멀리 떠나는 것은 그 사람을 둘러싼 온갖 사회적 관계와 관습들을 송두리채 끊어내는 급진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이 가장 불안정 한 사회에서도 강한 관습의 힘은 여자들을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자스민은 모험가의 이름이다. 떠날 때 그녀의 이름은 자스민이다. 그러나 인도의 가난한 집의 다섯째 딸인 죠티는 그렇지 않았다. 죠티였고 자스민이었던 여자가 미국 에서 제인이 되었을 때 그녀는 싸우는 이이고 적응하는 이이다. 제인이 자신의 몇 생 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는 또 자스민이 되어 곧 떠날 것이다.
     어머니는 죠티를 낳기도 전에 지우고 싶어 했다. 딸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딸에게서 지참금 없는 신부의 고통을 면제해 주고자 했던 것이다. 죠티는 마 스테르지 선생으로부터 영어를 배울 첫번째 여자 후보자였다. 마스테르지 선생과 어머 니는 아버지와 할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더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한 다. 지참금을 가져갈 수 없는 죠티는 나이 많고 자식도 많은 홀아비에게 시집갈 수도 있었다. 할머니는 그 기회를 마다한 어머니를 딸의 장래를 망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죠티가 여자들의 세계를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대담하고 날랜 꼬마 아이였을 적부터 죠티는 언제나 여자들의 혼이 자기를 지켜준다고 느꼈다. 그녀는 동네 여자들과 함께 하는 여자들의 시간을 좋아하고 집안 일을 잘해냈다.
     프라카시는 그녀의 첫번째 남편이었다. 그녀는 보기도 전에 그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가 그에 대해 물어보았던 것은 그가 영어를 할 줄 아느냐는 한 가지이다.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은 새로운 더 나은 삶을 바란다는 것이다. 현대적인 인도를 꿈꾸고 봉 건주의를 미워했던 프라카시는 지참금도 없이 그녀를 신부로 맞이하고 어른들을 모시 는 대신 그들만의 생활을 꾸리며 그녀로 하여금 대명사 대신 자기 이름을 부르게 한다 . 기술자였던 프라카시는 그녀에게 자스민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이전에는 감히 그녀 가 꿈꾸지 못했던 삶을 바라게 한다. 그녀는 이상주의자 프라카시의 '피그말리온'이었 다. 그가 바라는 삶을 얻기 위해 미국으로 가기 전, 프라카시는 과격한 시크교도의 폭 탄에 의해 살해당한다. 쓰러진 프라카시의 몸 아래서 죠티는 기적적으로 무사하다. 그 폭탄은 그녀를 향한 것이었다. 프라카시가 바라는 대로 남편의 이름을 부르려고 노력 하고 영어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죠티-자스민은 남편 대신 남편의 양복을 미국에 가져가서 화장시키고자-그리고 그 불에 자기의 몸을 던지고자 미국으로 건너간다.
     위조된 여권을 가지고 어느 노선에도 적혀있지 않은 비행기 편으로 자스민은 미국 으로 건너간다. 남편의 양복을 태우기도 전에 짐승같은 반쪽 얼굴에게 강간당한 자스 민은, 미국에서 스스로를 화장하는 대신 반쪽 얼굴을 살해하고 스스로 원해본 적 없는 아메리카의 삶을 시작한다. 테일러-와일리 부부의 집에서 어린 더프를 돌보는 일을 맡게 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삶을 사랑하게 된다. 와일리가 떠났을 때 그녀 는 '곤두박질 치듯' 테일러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테일러에게 그녀는 제 이스였다. 그 부부의 집에서 제이스는 한 가족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느낀다. 존 중받는 즐거움을 알게 된다. 테일러는 유머 감각이 넘치는 미국 남자이고 제이스를 있 는 그대로, 부드럽게 사랑하고자 한다. 그 때 만약 프라카시를 살해한 시크교도인 수 크 윈더를 만나지 않았다면 제이스는 테일러와 더프와 함께 한 가족이 되었을 것이다. 악몽을 떨치지 못한 제이스는 다시 한번 이주를 감행한다. 그녀는 아이오와로 떠난다 . 그곳은 한 미혼모가 더프를 낳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아이오와에서 그녀는 버드라는 쉰살이 넘은 은행가와 살게 된다. 버드는 그녀를 제 인이라고 부른다. 버드는 그녀를 자기의 구원으로 여긴다. 버드는 캐린과 이혼하고 제 인과 동거를 시작한다. 그리고 둘이 함께 베트남 난민인 듀를 양아들로 맞아들인다. 제인과 살게 된 후 버드는 성난 농부의 총에 맞아 하반신 불구가 된다. 제인은 또 다 시 돌보는 이가 되었다. 그녀가 사랑한 이국인 아들인 듀가 자신의 누이를 찾아 불쑥 떠나가고 어느날 테일러와 더프가 그녀를 찾아낸다. 그녀는 테일러를 기다리고 있었고 다시 자스민이 되어 그와 함께 떠난다.

     이 소설의 커다란 매력의 하나는 주인공의 여러 개의 자아일 것이다. 그녀는 이 여 러개의 자아를 인도의 환생의 개념으로 풀어낸다. 죠티와 제인은 자스민의 지난 생이 다. 그녀는 떠나게 될 때 자스민의 생을 다시 불러낸다. 할머니로부터 받은 빛이라는 뜻인 죠티의 생로부터 죠티라는 발음을 해내지 못하는 미국인들로부터 불리우는 제이 스나 제인이라는 이름의 생을 거치는 동안 자스민은 성장하고 성숙해나간다. 본래는 첫 남편인 프라카시가 붙여준 이름이지만, 다른 힘에 의해 쫓기는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제인을 떠날 때, 자스민은 자기 자신이 부르는 이름이 된다. 이러한 여러 개의 자아의 매력은 작가가 구사하는 자유로운 문장과 구성을 통해 더욱 빛난다. 버드와 살고 있는 제인의 현재의 삶이 과거의 삶과 중첩되어 서술되며 과거 시제와 현재 시제 가 혼용되다가 제인이 자스민으로 떠나는 곳에서는 강렬한 진행형의 시제가 된다. 그 녀에게 과거는 연대기적으로 이전의 시간이 아니므로 이전의 삶을 묘사할 때에도 우리 는 에너지와 자발성이 깃들인 문장을 만난다. 또한 자기 자신을 부르는 일인칭 대명사 와 이름에서도 우리는 묘한 낯설음을 보게 되는데 죠티와 제인과 자스민은 같은 사람 이면서 또 다른 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흔히 일인칭 주어로 서술될 때 빠지기 쉬운 자기 함몰과 자기 연민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효과를 가진다.
     인도 출신인 무커르지가 사건들을 서술할 때 그 사건들의 관계는 서구 소설의 오랜 전통인 인과 관계나 또한 현대 작가들이 실험하는 우연성과 약간 다르다. 그것은 그 녀가 이마에 가진 제 3의 눈과 같이 사물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학자인 테일러와의 대화에서 제이스는 아버지의 죽음을 말하면서 그렇게 해서 아버 지의 죽음이 자신을 프라카시와 결혼하게 할 사명을 가지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 프라카시의 죽음은 그녀가 혼자의 힘으로 자스민이 되기 하려는 사명을 가진 것일 수도 잇다. 제이스가 아이오와를 떠나게 된 것은 더욱 성숙해지기 위한 것일 수도 있 다. 그녀는 아직 완전한 자발성과 자기 긍정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 당 수크 윈더의 사명은 어쩌면 그녀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건은 이렇게 표 면적인 의미와 이면의 관계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혼돈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무커르지의 실험성은 서구의 아방가르드 전통에서 비껴나 있다. 서구의 남 성작가들이 오랜 역사를 거치며 형성된 강고한 자아와 고정된 인과 관계를 해체하기 위해 실험한다면 그녀의 실험은 오히려 더 강력한 자기 긍정을 얻는데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서구의 남성 작가들과 제3세계적 전통에 속한 여성 작가가 서로 다른 문학적 역사 속에 살아간다는 이야기도 된다.
     무커르지의 실험은 완전한 것은 아니다. 너무나 많이 빼앗겨 왔던 여성들이 자기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스민>의 결말은 논쟁적이다. 불구 가 된 버드는 제인을 필요로 한다. 제인은 버드의 아이를 가졌고 제인을 사랑하는 버 드는 오랫동안 제인에게 구혼해 왔다. 그러나 제인은 그와의 삶에서 부족함을 느낀다. 그녀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삶 대신 자기가 원하는 행복 쪽으로 발을 딛는다. 그 어 느 쪽도 완전하진 않다. 그러나 자스민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여성 작가의 소설에서 여성을 그리면서 이렇게 자신감에 찬 서술을 한 예를 나는 그다지 알지 못한다. 시점과 시제, 인과 관계의 혼란, 자기 몰두나 자기 긍정, 논쟁의 여지를 가진 선택과 같은 이 소설의 모든 특성을 나는 '여성적 글쓰기'의 전범으로 보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여성적 글쓰기'란 자스민과도 같이 여러 얼굴을 가졌고 여 러 개의 시간을 가졌으며 아직도 성장해가는 논쟁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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