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종로김밥: 길 위에서 나는 너를 보았지


홍선미

리는 둘 다 일하는 어머니를 가졌다. 우리 어머니들은 밤늦게 지쳐서 들어온다. 우 리는 특별히 기형도를 좋아하지 않지만, 우리 마음의 지하실에는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같은 발 소리 타박타박 안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기형도가 산다.

는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했다. 너무 일찍 죽어버린 아버지를 생각하며, 너는 책임질 수 없는 약하고 슬픈 것들을 세상에 데려올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사랑 을 할 수가 없다. 자기의 고통에 민감하고 다른 이의 고통에 둔감한 사람의 사랑은 사 랑이 아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의 눈에서는 멈추지 않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 고, 그 눈물을 마시고 사막에서도 살아남게 되었다. 우리는 둘다 인간이라는 것이 보 기보다 훨씬 깨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로 인해 인생의 어떤 부분을 포기하려 한다.

것이 우리가 어둠 속에 잠겨 빛나는 스크린을 바라볼 때 가장 살아있다고 느끼는 이 유인지도 모르겠다. 너는 밤마다 꿈을 꾼다. 잠을 자면서 꿈에서 사는 삶이 훨씬 더 삶처럼 느껴진다고 네가 말했을 때, 나는 우리의 병이 참 깊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한 계절에 한 번 함께 영화를 보러 간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김밥을 먹는다. 크고 두툼 하고 건조하고 적당히 식어있는 김밥은 어머니가 싸주던 김밥과는 다르다. 그런 김밥 은 언제 어디에서 먹어도 번잡한 종로의 인파 속에 혼자 있는 것처럼 허기지다. 허기 진 영혼을 가진 사람은 오래 걸을 수 있다. 언제나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언제나 무엇 인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이들을 가는 곳 모르고 서성거리게 만든다. 영화관이 세 개 나란히 있는 동네, 한 영화관에서 다른 영화관으로 가는 고개에는 바람이 미친 듯 불 었다. 우리가 보고 나온 영화에 대해 각자 생각하면서 너와 나는 친구들, 인간관계, 생활의 지루함, 요즘 날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동안 함께 본 영화들을 기억해내고 지난번 만났을 때 한 일들을 기억해낸다. 우리는 벌써 추억을 산다.

침에 나갈 때의 공기가 누구에 의해서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있다가,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오는 그 느낌이 너를 무너지게 한다. 혼자 일어나서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집을 나서고 지하철 안에서도 혼자인 사람은, 어쩐지 피부도 나빠지고 웃는 것이 어색해지고 조금씩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자기 자신을 잃어간다. 그럴 때 집없 는 고양이나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개를 만난다. 불쌍한 것들. 내가 영원히 그 불쌍 한 것들 곁을 떠나지 못하고 어떡하니 어떡할까 널 집에 데려가 기를까 쓰다듬어주고 있는 동안, 또다른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지나쳐간다. 내가 태 양, 새소리, 바람, 빛나는 초록색 청춘들, 향수냄새, 잠, 그 때 그 웃음 들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가슴을 베일 때, 또다른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고 그 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견딘다. 한 달에 한 번쯤, 나와 나는 싸우고 서로를 죽이고 싶어하지만, 그 때를 넘기고 나면 이젠 지쳐 이혼도 하기 귀찮아진 부부처럼 제법 평 화롭다.

린 시절 잠시 같은 반이었던 너를 몇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날, 너는 건너편 횡단 보도에 서 있었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무덤덤하게 정면을 바라보았 다. 우리가 친구가 되리라는 걸 그 때 우리는 몰랐다. 우리가 친구가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가 친구가 된 다음, 너와 나는 자살같은 건 하지 않기로, 자연사 할 때까지 살아있기로 약속을 했다. 군대를 가고 외국을 가고 실연을 하고 전공을 바 꾸고 시험에 떨어지고 담배를 피우게 되고 우리는 더 이상 예전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 누지 않게 되었지만, 그 약속 안에서 언제까지나 우리는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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