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과 계급정치학』     -미셸 바렛 외



-이가은-   

     이 책의 주 저자는 '가족은 반사회적인가'라는 이제 페미니즘에서는 고전이 된 책을 쓴 영국의 좌파 페미니스트, 미셸 바렛이다. 특이한 것은 책이 바렛의 논문 '오늘날의 여성억압'에 이어, 몇몇 영국 좌파진영의 페미니스트들이 그것을 비판한 글, 바렛이 거기에 대해 다시 답변한 글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책의 이러한 구조는 내게 낯설고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논쟁은 책을 읽는 내내 나로 하여금 '우리나라의 여성운동 내에는 과연 논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회의적 물음을 갖도록 했다. 어떤 종류의 페미니즘 이론은 항상 소개되는 방식으로만 우리가 접할 수 있을 뿐이었고, 한 이론과 다른 이론이 충돌할 경우에도 그것들은 우열관계 없이 단순히 나열될 뿐이었다. 우리의 운동이 너무도 저열한 적들을 만나 그 동안 숨돌릴 틈 없이 싸워야 했다는 점, 또한 학계에서 여성학이 연구된 역사도 지극히 짧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현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혹시라도 우리의 태도가 안일한 것이 아니었던가를 반성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단지 우리가 소수이기 때문에 입장의 차이를 넘어 뭉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입장의 차이 자체를 무화시키는 오류를 범했던 것은 아닌가? 나는 이 물음을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화두로 삼았으면 한다.

      바렛은 성별관계의 작동방식을 규명하고 역사유물론에 의해 이해되는 생산/재생산 과 정과 젠더관계는 어디에서 구별되고 연관되는 지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는 이를 위해 먼저 '맑스주의 페미니스트 분석의 몇 가지 개념적 문제'라는 글에서 지금까지의 이론들에서 가부장제와 재생산,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개 념들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분석하면서 몇 가지 문제지점을 짚어 나간다. 그는 가부장 제를 '생물학적 관계'로 바라보는 밀레트나 파이어스톤과 같은 급진주의자들의 관점은 생물학적 결정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크리스틴 델피처럼 거기에 대해 좀더 유물론적인 접근을 시도했던 이들의 경우도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생산양 식'의 관계를 명확히 해명하지는 못했다고 비판한다. 특히, 그녀는 '가부장제'를 초역 사적으로 존재하는 광범위한 남성지배의 일반으로 보거나, 아예 현대 자본주의를 '가 부장제'로 묘사하려는 시도들을 견제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때 '가부장제'가 아버 지의 지배로서의 가부장제인지 남성의 여성지배로서의 가부장제인지에 대한 논의가 혼 란을 겪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데올로기로서의 '가부 장제'라는 개념을 한정적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하나의 명사화된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그는 또한 맑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이 페미니즘 진영과 피할 수 없는 관련을 맺 고 있음을 지적하고-왜냐하면 여성억압이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거대하게 작동하고 있으므로- 그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려 한다. 그는 남성들이 그들의 여성에 대한 지 배를 존속시키기 위하여 퍼뜨린 허위의식으로 이데올로기를 바라보는 입장을 거부한다 . 반대로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이데올로기가 경 제적인 부분과 어느 정도의 상호 연관성을 지니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즉, 알튀쎄가 얘기했던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자율성에서 그 상대적인 성격을 좀더 정교하게 밝히는 것이 분석의 열쇠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맑스주의 페미니즘에서 이데올로기 문제와 연관된 것으로서 가부장제에 대한 기능주 의적 설명에 관한 문제가 있다. 기능주의적 설명은 가부장제를 자본의 영속화에 기능 하는 체계로 보는 관점이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역사적으로 꾸준히 있어왔던 모순과 갈등, 정치 투쟁 등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으며, 자본에 대한 투쟁과 결부되지 않은 어떠한 여성주의 운동도 무용한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시키기 때문에 지금까지 많은 페 미니스트들에 의해 비판받아 왔다. 바렛은 여기에 대해서도 위에서 취했던 입장과 유 사하게, 젠더 분업이 자본에 상대적으로 기능한다는 다소 모호하지만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는 기존의 맑스주의적 설명이나 급진주의적 설명이 가지고 있던 환원주의 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모호함을 감수하고라도 차라리 둘 사이의 위험한 곡예를 선택한 듯 하다.
      눈치 빠른 이들은 짐작했겠지만 바렛은 결국 맑스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급진주 의적 페미니즘에서 축적된 유용한 설명들을 효과적으로 통합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따 라서 그는 페미니스트 분석의 핵심 범주인 '가족'에 대한 논의에서도, 자연적이며 본 질적인 단위로서의 가족을 부정하고, 역사적 현실과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변 화 지점으로서의 가족을 상정한다. 즉, 그는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가족을 자본에 기능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결과로서 인식하는 관점이나,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가 족을 가부장제의 원인으로 인식하는 관점 모두를 극복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서, 가족의 물적인 측면과 이데올로기적 측면으로서의 '가구-가정이데 올로기체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는 너무 이론적인 개념으로 보인 다. 그도 밝히고 있듯이 물질적 조건과 이데올로기는 간단히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며 , 그는 여성억압의 고리를 풀수 있는 열쇠가 바로 가구와 가정이데올로기의 괴리를 이 해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결코 그 둘의 괴리를 딱히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그는 현자본주의의 가구-가정 체계가 남성이나 여성, 부르주아나 노동자계급 중 누구에게 이익을 주고 있는가는 분명한 답이 없으며, 그러한 이익 자체가 매우 분 열적인 것임을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밝혀 나간다. 그가 결론을 확실히 밝히지는 않았 지만 누군가 그에게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가부장제가 아닌 체계 속에서도 최고의 효 율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에 이런 말을 잊지 않는다.
      "여성해방의 가능성이 결정적으로 자녀양육의 재분담에 놓여져 있다는 결론은 절대적 으로 옳다. 이것은 임노동 영역의 성별분리에 대한 완화가 여성억압을 종식시키지 않 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하의 생산조직은 자녀양육이 이런 식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가정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었다고 여전히 언급된다. 따라서 이러한 자녀양 육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어떠한 자발적인 시도도 성공할 것 같지 않다. 그것은 자 녀양육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성별 노동분업이 현재 자본주의 생산관계 안에 뿌리깊게 침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바렛의 논의에서 몇몇 지점을 지적하고 있다. 브레너 와 라마스는 '여성억압의 재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자본주의 하에서의 성별분업을 바 라보는 바렛의 관점이 단순하기 짝이 없다고 비판한다. 즉, 그들은 바렛이 '성별분업 이 자본주의 생산관계 안에 뿌리깊게 침투해 있다'고 했을 때, 과연 '무엇'이 성별분 업을 '어떻게' 자본주의 생산관계 안에 뿌리깊도록 했는지를 모호한 채로 남겨두고 있 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비판은 타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바렛의 설명처럼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분명히 현재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에 깊 이 각인되어 있는 이상, 그 원인과 작동구조를 밝혀야만이 오늘날 여성억압을 효과적 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기에 대해 그 원인은 바로 '생물학적 재생산'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동안 이 생물학적 재생산의 주체인 여성을 노동자 로 고용할 경우 자본의 이윤을 감소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성별분업이 일어났다 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성별 분업은 자본주의 사회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 아 니라, 자본주의의 특정한 역사적 시정의 복잡한 세력균형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고 결 론짓는다. 그러나 나는 브레너와 라마스의 비판이 그 지점은 상당히 정확했으나 생물 학적 재생산의 문제를 '자본주의적 체계' 안으로만 고정시키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나타날 수 있는 효과들-이를 테면 공적 노동의 성별분업 이외에 가족 내의 성별 분업 과 같은-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허점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바렛 역시 이러한 점을 근거로 브레너와 라마스의 관점은 분명히 경제적 범주 내에서 만 진정한 설명력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들의 비판에 맞선다. 또한 바렛은 생물학 적 재생산을 정치적, 사회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물학적 재생산이 일관되게 자본주의 경제 구성에 어떠한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

      책의 끝 부분은 1986년 영국의 '페미니스트 리뷰'에서 열었던 영국 사회주의 페미니 스트들의 좌담회를 정리한 것이다. 이 좌담에는 미셸 바렛을 비롯하여, 안젤라 와이어 , 엘리자베스 윌슨, 베아트릭스 캠벨, 앤 필립스 등이 참여하였으며 정리 글은 그들의 정치적 입장 차이가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 맑스주의 페미니즘을 정리해버리고 이제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요즘의 페미니즘을 대변하고 있는 한국에서, 계급과 성 둘 다를 놓지지 않 으려는 위와 같은 다양한 논쟁들은 분명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직까지 우리는 우리 의 역사를 유물론적으로 분석하여 여성억압의 구조를 설명하려는 기획이 없었다. 항상 현실이 이론을 앞서감을 생각할 때, 그것은 어쩌면 많은 부분 공허하고 낭비스러운 노력이 될 수도 있으며, 그간의 투쟁보다 더 힘든 노력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항상 현실을 해석해내는 틀을 만드는 데 주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틀은 또다시 새로운 현실 앞에서 깨져야 할 것이며 이는 치열한 토 론과 진정한 소통을 통해서 만이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