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얼마나 더 가난해져야 하는 거야?
   -'에코페미니즘'을 읽고

 


별족

책을 읽는 게 고통스러운 건 이런 때다. 모든 것에 동의하는데, 그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나를 자각하게 되는 때.

이 책은, 방랑벽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늘 상황들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들고는, 정규직 노동자의 하루치 근무시간을 차안에서 보내야 겨우 집-고향-에 갈 수 있는, 요즘의 내가 차안에서 읽은 책 중 하나다. 그렇게 읽고 나서 내내 절절히 동의하면서 자괴감에 빠진 거다, 왜 나는 이렇게 살지 못하는가?

부끄럽게도 편협한 나는 '문명의 충돌'을 읽을 수 없고- 알량한 평화주의자-,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를 읽을 수 없다-좌파, 민족을 버린 국제주의자-. 의도적이든 평화로운 우호의 증거를 보고 싶고, 적어도 세상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은 아님을, 믿고 싶다. 다른 철학이 삶의 근거가 되는, 다른 가치가 소중한 세상을 바란다. 그래서, 이 책은 끝까지 읽을 수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내 삶때문에 아프다. 자초한 고통, 그래도 이렇게 살지만, 그래도 동의한다는 몸의 흐릿한 증명 같은 거다.

머리가 멍해지는 그 짧은 순간, 관계들을 끊어내고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의 상태가 참으로 무용할 때, 내가 만든 거란 자각없이 내가 참 쓸모없다 느낄 때, 내 자신을 부양하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진정 그러한가 의심이 비죽비죽 솟는 어떤 때, 이 책은 내게 닥쳐서는 '너는 너를 부양했던 게 아냐', '산업에 종사하는 것, 산업화의 무언가를 누리며 네가 더 발전했다고 느끼는 그 순간, 네가 행한 착취는 지구 반대편에서 작동하는 거야', '지구는 하나고, 넌 자원을 더 누리기 위해서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거짓을 남발하고 있어', '이제 네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네 주위의 산과 강과 동물과 식물이겠지만, 다음은 아니 이미 너의 피와 살과 장기는 조각조각 일체성을 잃을 거야', '네가 자연과 하나라는 자각을 잃어버릴 수록 넌 점점 무가치해질 거야'라고 닥달한다.

자본이 참으로 무섭다고 느끼는 때는, 바라고 있는 게 무엇이었나를 계속 잊게 만들고, 그 자체로 이미 완결성을 있어 이미 사람에게는 통제력이 없는 게 아닐까 싶은 때다.

파업이 무산되는 경험을 했다. 파업의 전단계에서 내가 좋아한 것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었다. 늘 나누던 짧은 인사나 사무적인 대화말고 이 자리에 모인 만큼은 같은 뜻이라는 동료들과 함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봉제가 도입되면 노조는 끝장이라는 회사의 협박이 무섭다. '돈을 벌어서 뭐할 건데?'란 질문에 눈만 꿈뻑 꿈뻑하는 사랑할 사람도 시간도 없는 부속이 되길 바라는 게, 그걸 종용하는 관리자조차도 이미 자본에 통제당하는 존재라는 것 때문에 겁이 난다. 그런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단결인데, 그게 얼마나 약한지 알기 때문에 또 겁이 난다.

가치가 다른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순간에, 함께 할 누군가가 없다면 기운나지 않을 거라고 의기소침해지고, 또 나만 변해서는 위험하다고 혼자만 파멸하지 않는 무수한 행위들 막아야 한다고 또 안절부절이다.

필요가 적은, 적어도, 내가 돈때문에 소중한 걸 후순위로 미루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순간에 내 삶 어디도 자유롭지 않다는 걸 안다. 심지어 농사조차도 너무 많이 종속되어서는 '그럼, 안 그러면 나눠 먹을만큼도 안 나와'라는 대답을 듣는다. 과학이나 의학따위 미친듯이 달려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에 '네 아기가 병들어 죽어가도 그럴 수 있어?'라는 사랑을 시험당하는 질문을 받는다. 나를 병들거나 죽게 하는 걸 단 하나의 이유로 말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정작 그 순간 내가 모든 것을 토막낸 그 과학이란 것에 의존하지 않을까, 그만 멈추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근심한다.

소비를 줄이지도 않으면서 자연을 선망하는 불균형을 깨기로, 소박하게도 나 살던 흔적이 정말 적도록 하자고 결심하면서 지금의 나를 변명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게 왜 에코'페미니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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