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 번 글: 여인열전 4 - 조선희 |
| 글쓴이: 무넝이 |
글쓴날: 2003년 05월 23일 22시 27분 |
읽은수: 7587 |
조선희. 60년 생. 전 씨네21 편집장. 그에게 한겨레는 무엇이었을까. 유신시대를 어렵게 살아온
선배들이 만든 한겨레, 자기 대학생활의 일부였던 운동의 기억을 간직한 일터, 80년대에 "국영"
통신사에서 일하며 느낀 부채감을 넘어서게 하는 회사라고 하면 적절한 표현일까. 그는 자기
책에서 되풀이하여 말했다. 여기자도 권력욕을 가져야 하고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한을
따내야한다고. 여자 편집국장이 나오려면 여기자도 정치 경제 사회부를 돌 수 있는 구조로
신문사가 바뀌어야 한다고. 그러나 여전히 특별한 빽 없이는 여자는 일간지의 정치부장도
경제부장도 사회부장도 될 수 없는 사회에서, 한 때 "민주"의 기수였다고 해도 결국은 그런 사회
안에 있는 한겨레에서, 그는 자기가 "한없이 올라갈"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씨네 21 사업계획안은 조선희가 짠 것이었고, 창간작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도 신이 나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한겨레신문사의 담당 간부들은 시작부터 그에게 한겨레21로 구축된 제작 및
판매 시스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씨네21을 창간하는 것이니까 추가비용 투입은 최소화해야
한다고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주어진 여건은 턱없이 열악한데 잘 하지 못하면 최종적인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하는 자리……. 내 경험에 따르면 그런 자리에 대처하는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초장에
피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투신해서 잘 되도록 만들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투신"에 따른 특별한
보상이 있을 때에만 투신을 선택한다. 조선희에게 그 보상은 무엇이었을까. 편집장에게 주어지는
권한과 책임, "안 되면 되게 하라" 식의 성취욕도 "투신"의 동기가 되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이미 여기자 생활 십수년이었으니 그는 씨네 21 편집장을 맡는다고 해서 자신을 금방 "국장"으로
승진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아니, 그 잡지가 실패하게 되면 오히려
신문사를 나오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시작도 하기 전부터 취재기자 4~5명
이상 써서는 안 된다고, 편집담당은 1명으로 해결하라고 말하는 간부들과 싸워야 하는데, 능력
있는 영화담당 기자를 다른 곳에서 데려오는 일도 온통 자기 어깨 위에 떨어져 있는데, 동료들이
씨네21 때문에 한겨레가 망하는 것 아니냐고 수군거리는데, 그 시점에서 씨네21이 국내 주간지
판매 부수 1위가 될 거라는 것을 예측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씨네21에 투신한 데에는 한겨레가
그만한 임무를 자기에게 맡겼을 때에는 잘 해 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 책임감은 한겨레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씨네 21 때문에 한겨레를 망하게 할
수는 없다고, 내가 그토록 사랑한 것에 내가 짐이 되지는 않으리라고, 나는 이 잡지가 한겨레에 돈을
벌어주게 할 거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 같다. 나에게 딸을 키우면서 매일 12시간씩 일 하라고 해도 할
거라고, 창간준비와 관련해서 내가 한겨레 간부들과 싸우는 그 순간에도 한겨레에 대한 내 사랑을
접지는 않을 거라고, 저렇게 내 편인 사람들도 내 곁에 있지 않은가 하고, 그는 생각했던 것 같다.
최선을 다 하고 있는데도 욕을 먹어야 하는 자리를 견디고도 돌이켜보며 앙심을 품지 않게 하는
것은 사랑 아닌가. 다행히, 혹은 당연히, 조선희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모든 것이 용서되지
않는 그 어려운 자리인 씨네 21에 와서, 스캔들로 잡지를 도배하지 않고 한국영화의 장점을
부각시키면서도 돈을 벌어들여야 하는 그 자리에 서서, 살아 남았다.
바로 그 점에서 그는 세상의 "김훈"들을 넘어서는 사람이다. "용비어천가"를 썼다 사실을 고백한
것뿐인데, 페미니즘에 대해 솔직히 말했을 뿐인데, 그토록 심하게 비판받았으니 김훈도 아프기는
했겠지. 하지만 그걸 두고 세상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리
아팠다고 해도 말이다. 비약인 줄 알지만 나는 "김훈"들이 견딜 수 없었던 자리를 조선희는
견뎠다고 쓴다. 조선희라고 사내에서 "회사 말아먹을 사람"이라고 욕먹는 것이 좋았겠는가. 감히
말하건대 그는 이름뿐만 아니라 사랑 때문에 일했을 것이다. 이름은 남이 알아줄 때 빛나지만
사랑은 그 자체로 빛난다. 이름은 남들이 입만 대도 쉽게 금이 가지만 사랑은 지금 잠시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게 한다.
조선희는 정말 자기 어머니에 대한 소설을 쓰게 될까. 아이들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면 여기자들이 우습게 보일까 두려워서 그 이야기는 쏙 빼고 소설 쓰고 싶다는
이야기만 했다니 과연 부하 직원들 앞에서 자비로 칸 영화제에 다녀온 과거를 들먹이면서 출장비
주는 걸 가지고 "세월 좋아졌다" 운운하는 꼰대답다. 이 못 말리는 80년대 식 여인을 앞에 두고 나는
깔깔 웃는다. 그가 이제 번잡한 편집장 생활을 접고 야인이라도 될 것처럼 하고 있으니 무언가 큰
변화를 겪고 있기는 한 셈이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다고 내멋대로 생각한다. 그가
한겨레에 투신한 것도 사랑 때문이고 어머니에 대해 쓰고 싶어하는 것도 사랑 때문일 거라고, 이
사람은 늘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투신할 줄 아는 여자였을 거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설령 당장
훌륭한 소설을 쓰지는 못하더라도 잘 나가는 편집장 자리를 접고 한겨레를 그만둔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씨네 21이 자기가 움켜쥐고 있지 않아도 반듯이 설 수 있는 성공한 영화
주간지가 되었는데, 그토록 빛나는 사랑이 이루어졌는데 무엇이 아쉬울까. 진정으로 사랑에
투신했던 사람은 뒤돌아보며 후회하지 않는다. 이제는 더 늙기 전에 어머니의 이야기를 써 남길
때가 된 것이다. 조선희가 세상의 빛 한가운데에서 마음껏 사랑하고 일하는 동안 어머니는 항상
세상 찬바람 속에 서 있지 않았나. 그의 어머니는 전쟁통에 참혹하게 친정붙이를 잃고 생활비를 제
때 주지 않는 남편 곁에서 시앗을 보고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지 않았나. 이제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 여정이 습작과 독서의 지난한 길이 될 지라도.
그의 책은 하나도 감상적이지 않은데, 나는 혼자 앉아 잠시 운다. 내 마음은 열정만으로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 앞에서는 냉담하다가도 '경제자립이 없으면 자유언론도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그걸 알면서도 '자유언론'을 버리지 않는 이 사람의 사랑 앞에서는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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