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3 번 글: 글쓰기가 꾸는 꿈 |
| 글쓴이: 무넝이 |
글쓴날: 2003년 01월 20일 00시 42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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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전공하는 후배를 만나면 보통 글쓰기나 글읽기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은 하게 된다. 하지만 소설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장르의 경계는 어디 있는가 그런 이야기는 들어도 잘 모르겠다. 누군가는 내게 소설가로서 최인훈의 약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고종석 소설이 형상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가르쳐준다. 들을 때는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다. 그러나 돌아서면 그런 이야기는 기억이 통 나질 않는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만난 사람들의 목소리, 그 목소리의 고저강약. 내가 본 세상의 기울어진 모습. 살아온 삶을 반쯤만 드러내는 반투명한 표정들. 내가 아는 사소한 비밀들. 퇴근 후 시간을 쪼개어 틈틈이 성매매금지법을 입안하고 있는 아저씨가 사실은 몹시나 가부장적이라는 사실. 내게 "언니, 사람들 사이에는 근원적인 적대감이 있는 것 같아요."라 말한 후배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예의바르고 부드러운 사람이고, 부모성 같이쓰기를 꽤나 못마땅해 하는 내 오랜 친구는 그러나 지겨워하지 않고 아줌마처럼 여자 친구들의 사소한 이야기에 오래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사소한 일에도 너무 마음이 잘 상해서 저 사람은 아직도 소녀 같은 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던 선배언니는 용감하게도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먼 곳으로 시집갔다.
소설이든 시든,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그들이 홀로 또는 함께 흔들리는 그 순간에 그들의 온 몸에 마이크를 갖다 댈 수는 없을까. 그 흔들림을 혹자는 가능성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위험이라고 부르는 건데 말이야.
어떤 말을 전하기 위해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들쳐보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네 생각보다 세상은 추악해," 혹은 "네 생각보다 세상은 아름다워,"라 말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정말 어려운 것은 상반된 것들이 어떻게 한 사람 안에 함께 있는지, 어떻게 한 집단 안에 함께 있는지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 상반된 것을 안고도 한 사람이, 이 세상이 바닥으로 뽀글뽀글 가라앉지 않고 어디론가 움직여가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나직나직하게 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힘있게 하는 것이다.
내가 본 세상 사람들은, 그리고 나 자신은 어지럽고 뒤죽박죽이다. 대화를 한다고 하는 순간에도 오가는 말의 반 이상은 동상이몽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마솥에서 질투심이 부글부글 끓고 자기중심성이 소용돌이치다 거품을 뽀글뽀글 낸다. 튀어 오른다. 마주 앉아서도 좀처럼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순간순간을 포착해내고 싶다. 동시에, 그들이 노상 그렇게 서로 딴전을 부리다가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힘을 주기도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짧은 순간 저들이 맞잡은 손을 잠자리채로 확 낚아채고 싶다.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말 한마디에 온힘을 담고, 자기가 어렵고 힘들어도 기꺼이 옆 사람의 안부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연필로 하나하나 그려내고 싶다. 그렇게 따뜻하던 사람이 상대에게 으르렁, 악의를 드러내려 할 때 순간적으로 방안을 채우는 긴장을, 사물이 긴장한 방안의 건조한 공기를 투명한 관에 담아 보여주고 싶다. 웃는 얼굴로 옆걸음질 쳐서 다른 사람의 가장 약한 부분을 발로 꽉 밟는 사람의 표정을, 무언가 책임지기가 싫을 때 자기 어려움을 과장하는 사람의 눈물을 포착하고 싶다. 내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선의를 베푼 사람들과 납득할 수 없는 악의를 보여준 사람들을 모두 기억하기 위하여. 그러나 그들이 평소와는 반대되는 모습을 드려낸 순간 역시 함께 기억하기 위하여. 그렇게 해서 그들을 진정으로 복원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진정으로 복원시킴으로써 내가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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