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9 번 글: 아라비안 나이트 |
| 글쓴이: 이은숙 |
글쓴날: 2003년 01월 15일 13시 05분 |
읽은수: 4434 |
회계사 시험을 같이 준비했던 녀석이 고급 중국 식당과 영화 수입과 연예인 매니지먼트를 하는
회사에 다닌다면서 간만에 여의도에 나타났다. 도대체 은퇴한 프로야구 선수들과 연예인들과 계약
이행을 제대로 하지 않는 영화 마케팅업자들 근처에 살면 어떨지 나는 상상도 되지 않는데 그는 그
정신 없음에 대해 무척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기 말로는 자기가 회사 사람들과 거의 24시간
같이 지내며 평균 5~6명이 자기 원룸에서 실질적으로 기식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전까지 자기가
머리를 하늘색으로 물들였었다고 했다. 문득 녀석이 예전에 3열람실에서 뒷호주머니에
미키마우스가 수놓아진 청바지를 입고 다니던 것이 기억났다. 어머니가 보내주었다고 했던가.
하늘색에서 회색으로 변해가는 머리라구? 외모랑은 담 쌓고 살더니 어찌된 일이지. 왠지 웃음이 몸
속에서 비죽비죽 솟아나는 것 같았다. 자식, 오래 아프더니 사람이 변했나. 아니야, 원래 저랬던 것
같기도 해.
녀석은 자칭 "연예인"인 또 한 사람을 더 데려 왔는데 정말로 방송국에서 방금 나온 것인지
파운데이션을 나보다 더 두껍게 바르고 있었다. 나는 그린 듯 만 듯 옅지만 섬세한 아이라인이
신기해서 이 "연예인"을 잠시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우리와 동갑이라고 했다. 자기 말로는 자기가
"ㅌㅌㅌ"라는 프로에 몇 년이나 출연했었다면서 자기를 모르느냐고 했다. 나는 얼떨결에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고 대답하고는 민망해서 계속 웃었다. 자기는 보통의 경우 고상한 척 하느라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무척 싫어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 경우는 사실을 말하는 것 같아서 봐주겠다고 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만나서 나는 유쾌해졌다.
여자 회계사라고 하면 뿔테 안경에 눈이 위로 찢어진 것 같은 딱딱한 사람일 줄 알았는데 호호
아줌마처럼 여유 있어 보인다고 대뜸 평을 했다. 자기는 "연예인"이기 때문에 내면을 빨리 읽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외모는 그렇다고 했다. 그러더니 방송국의 여자 PD들이 얼마나 못 생겼는지에
대해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투에는 못 생겼으면서 척척 일 잘 하는 여자들에
대한 경멸과 예쁘고 잘 생긴 연예인들이며 심형래 류의 "거물"들을 휘어잡는 여인들에 대한 경외가
동시에 담겨있는 듯 했다. 그가 자기 생각에 대해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아무런 방어막도 치지
않는 것이 놀라웠다.
"회사가 어디라고 하셨죠?"
"아라비아신용평가요."
"그게 어디 있죠?"
"**증권빌딩이요."
"아, 거기 8층에 **인베스트먼트 코리아라고 있죠?"
그는 **인베스트먼트 한국 대표가 원래 이스탄불은행 동경지점의 직원이었다는 둥, 그 사람 인맥이
대단하다는 둥, 언제 만난 적이 있는데 자기 돈은 50억 밖에 없으면서 전화로 신흥 재벌 2세들에게
전화를 해서 수천억짜리 투자자로 끌어들이는데 대단한 재주가 있다는 둥, 그 사람이
**인베스트먼트 대표 ***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둥 내게는 달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는 사연을 금새
엮어내기 시작했다.
'아라비안 나이트 출신이시군요. 저는 책에서만 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뒷골목으로 묘령의 여인들과 출처를 알 수 없는 돈이 굴러다니는 세계. 참기름 장사를 하다가 어느
날 요술쟁이의 손에 이끌려 그 세계로 나오는 젊은이. 나와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과 아무런 이유 없이 사기를 처먹는 사람들 사이에서 횡재와 파산을 반복하지. 횡재하게
되면 신나게 그 횡재를 누리고 파산하게 되면 두말없이 파산을 받아들이지.
"연예인"은 한참 **인베스트먼트 이야기를 하더니 친구 녀석에게 고개를 돌린다.
"야, **야, 아라비아신용평가가 뭐하는 회사야?"
"Moodys가 한국에 국가등급 AA를 줬네 어쩌네 하잖아. 쉽게 말해서 그런 비슷한 회사야."
"뭐, 저희는 국가에 등급을 매기지는 않고 회사에서 발행하는 채권에다만 등급을 주죠."
"공신력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런 셈이죠."
"회사 주인…, 사장이 누군가요?"
"사장은 월급쟁이구요. 아라비아은행이 좀 영향력이 있죠."
"**야, 아라비아은행은 어차피 나라 꺼 아니야? 여의도 저기 가니까 아라비아은행 건물이 큰 거 하나
있던데."
"그렇지."
내가 다니는 회사가 공신력이 있냐고 물었던 사람이 이번에는 대뜸 공신력과는 반대로 가는 엉뚱한
질문을 한다.
"아라비아신용평가에 몇 년쯤 다니면 촌지를 받나요?"
그는 아라비안 나이트 출신답게 아라비아신용평가에서 당연히 촌지를 받고 등급을 조정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왠지 그를 탓할 마음이 생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폭소를 터뜨린다. 사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개인이 촌지를 받는 것 같지는 않지만 100% 공정한 등급이 부여된다고
자신할 수는 없으므로. 아직 잘은 모르지만 ㅋ그룹의 등급도 대체로 너무 높고, ㅍ그룹도 문제가
있는걸 뭐. 그러나 무어라고 복잡하게 답을 할 기분은 아니다. 그저 술 정도는 같이 마시지만 촌지를
받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엉거주춤하게 대답한다. 그는 너무나 명쾌하게, 술은 곧 현금과 같은
것이라고 정리한다. 술을 얻어먹는 것은 촌지를 받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우리가 영업을 해야
하는 측면도 있으므로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항상 우리가 얻어먹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공신력이 있냐고 자기가 물어 놓고서도 당연히 촌지 없이는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의 말을 듣고 있으니 오히려 통쾌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가 본 세상이 그랬던
모양이지……. 친구 녀석은 제멋대로 끼어들어서는 촌지를 받으려면 아라비아신용평가에 3년에서
5년은 다녀야 하는데 나는 아직 급수가 너무 낮아서 촌지를 받을 단계가 아니라고 제멋대로 설명을
한다. 나는 점점 더 유쾌해진다.
무슨 이야기 끝에 그 전에는 메카회계법인에 다녔다고 하니까, 다시 친구에게 묻는다.
"**야, 너는 메디나회계법인에 다녔다며? 거기가 제일 큰 데 아니야?"
"어."
"그럼 너는 회계사가 되자마자 주류에 편입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회계법인 중 삼성전자에 같은 데
취직했고, 친구분은 개혁적인 성향 때문에 벤처에 취직한 셈인 거지?"
"어? 어어……."
"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죠. 메카도 큰 회사랍니다."
"회계사 한 20명 되는 회사 아녜요?"
"아뇨, 한 800명 되었답니다."
"그럼 알렉산드리아회계법인보다 더 큰 거네요."
친구가 대신 대답한다.
"그렇지."
"음."
만약에 회사의 크기를 가지고 메카가 메디나보다 개혁적인 성향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명료하게
구분할 수 있다면 그 세상은 나름대로 퍽 즐거운 세상일 것 같다. 주류가 되고 싶으면 메디나에
다니면 되고 "개혁적"으로 살고 싶으면 메카에 다니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게다가 선택권이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다면 그것도 참 좋을 것이다. 메디나회계법인조차도 거기 다니는 회계사들이
평안하게 주류라고 스스로 느끼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메카회계법인이 개혁성과 별 상관이 없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세상은 아라비안 나이트의 주인공 앞에서만 명료하다. 그러나 오늘은 이
젊은이가 때때로 짚어내는 일말의 진실에 대해서만 즐거워하고 싶다.
찻집을 나서는데 이 "연예인" 양반은 이번에는 내가 실크로드연대에 나간다는 이야기에 관심을
보인다.
"실크로드연대는 일요일마다 나가시나요."
"아뇨, 가끔 가요."
실크로드연대에 가서 예배를 보는 건 아니랍니다.
"거기 아는 사람이 있으셨나요?"
"아뇨, 오래 전에 봉투 붙일 사람이 필요하다고 학교에 포스터가 붙어있길래 찾아갔어요."
"실크로드연대는 누구를 미는 건가요? 노무현인가요?"
"글쎄요."
글쎄요. 아라비안 나이트에서는 천일이나 밤이 이어지니 긴긴 밤이 오고 또 가다 행여 언제 다시
만나게 되면 그 때 말씀드리지요. 제가 꾸는 꿈에 대해서. 노무현을 스치지만 비껴나가는 크고 작은
꿈에 대해서. 권영길을 만나지만 그것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장난꾸러기 꿈들에 대해서. 계산기
안팎에서 춤추는 꿈에 대해서, 아라비안 나이트의 뒷골목에서도 아라비아의 사막에서도 흔들흔들
춤추는 꿈에 대해서. 마신을 만나면 마신과 놀고, 이교도를 만나면 이교도와 놀고, 그리스 공주를
만나면 그리스 공주와 노는 꿈에 대해서. 낙타를 타고 카이로와 다마스커스와 바그다드를 오가며
양탄자로 수마트라와 히말라야를 넘나드는 꿈에 대해서, 우리가 사는 이 아라비안 나이트
구석구석에 깃들고 싶어하는, 그러다가는 때로 이 아라비안 나이트와 칼을 뽑아 싸우기도 하는,
요정이면서 무사이기도 한, 변신괴물 같은 꿈에 대해서. 그 때는 아라비아의 노래에 맞추어서,
혹은 아라비아의 노래를 무시하고, 혹은 아라비아의 노래에 맞서서 춤추는 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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