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7 번 글: 어머니, 나의 어머니 2 |
| 글쓴이: 이민화 |
글쓴날: 2002년 11월 20일 13시 05분 |
읽은수: 3014 |
우리 가족이 먼 나라에 살던 시절에, 두부를 먹으려고 하면 콩을 사 오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는
나라에 살던 시절에, 한국에서 국장이라든가 차관이라든가 하는 중요한 손님이 오면 우리는
손님을 집으로 불러야 했다. 아버지는 대사관에서 일했고, 그런 손님들 앞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해야 했다. 그 시절, 난 엄마가 스무가지나 되는 음식을 일사분란하게 흰 레이스 식탁보 위에
올릴 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라에서 그만큼 음식을 차리는 일은 차라리 닷새짜리
프로젝트 같았다. 며칠을 잡고 엄마는 식단을 짜고 냉동고에 한국에서 구해다 놓은 재료가 충분히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시장에서 장을 엄청나게 봐 와서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부터 순서를
잡아서 준비를 했다. D-day가 되면 나는 학교에서 오자마자 부엌에 들어가 수술방에 들어간
간호사처럼 대기하고 있었다. 엄마가 "간장"하면 간장을 건네고, "겨자"하면 겨자를 건넸다. 찬장
깊은 곳에서 은수저를 꺼내 은식기 닦는 약품으로 닦고 다시 약품을 퐁퐁으로 닦아 내고, 손님용
식기 세트를 꺼내 헹궈서 행주로 말렸다. 손님이 오면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하고 쟁반에 음료수를
받쳐서 돌렸다. 닭튀김을 바삭거리게 하려면 시차를 두고 두 번 튀겨내야 한다거나 전분 중에 가장
찰기가 높은 것은 감자전분이라든가 하는, 그나마 내가 음식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은 그 때
배웠던 것들이다.
내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엄마는 어느 날 다시 보니 만사를 남자의 시선으로 판단하는 낯선
사람이었다. 내가 방바닥에 흘린 머리칼을 제대로 줍지 않을 대, 책을 뽑아서 방 여기저기에 쌓아둘
때, 왜 있지도 않은 남편 걱정을 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어딘가 먼 국도를 따라
하염없이 걷고 싶을 대, 내가 남자애들과 맥주 한 잔을 놓고 깔깔거리고 싶을 때, 왜 세상의
남편감들이 "지나치게" 활달한 여자는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왜
미리 누군가가 날 심판할까봐 걱정해야 하는지. 어쩌다 설거지하고 싱크대의 물기를 닦지 않거나,
샤워하고 화장실 바닥에 머리칼을 남겨 두면 왜 시어머니가 날 싫어하게 되는 건지. 동생이 물리학
책을 읽고, 남자 친구들이 세상을 바꾼다면서 동분서주하는 동안 왜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고
"예쁜 옷"을 챙겨 입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어라 항의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자꾸 말수가
줄어가고, 목소리는 딱딱해지고, 그러다 어느 날은 스스로를 내버려두면 주먹으로 유리창을 깨고
말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고 멍하게 서 있었다.
어떤 날은 다만 유리창을 깨지 않기 위해서 긴 밤 내 몸도 마음도 동그랗게 웅크리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화를 내지 않기 위해서 낯설어진 엄마를, 엄마의 깊은 불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밤중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을 들여다보듯이 그렇게. 저 불안을 출렁이게 하는 것은 무얼까. 엄마
앞에서는 제대로 차근차근 말을 하지 못 하고 비꼬지 않으면 입을 다물었지만, 밤마다 나는 안으로,
안으로, 노래를 불렀다. 어떻게 하면 저 파도를 잠재울까. 어떻게 하면 저 풍랑을 잠재울까. 나는
한없이 소곤소곤 노래를 했다. 엄마가 너무 불안해해서 나는 제대로 화도 낼 수 없었다. 쉬잇…….
엄마, 그게 다는 아니야. 불안해하지 마. 내가 이렇게 쓰러지지 않고 서 있잖아. 쉬잇, 엄마. 내가 한
가지는 약속할게. 망가지지 않는다고. 나 자신을 함부로 하지는 않는다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든
아니면 다르게든, 세상에는 분명 내 자리도 있을 거라고.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나는 밤마다
노래를 했다. 쉬잇……. 엄마를 포기할 수가 없어서 나는 밤마다 아팠다. 들리지도 않는 내 목소리가
너무 한심해서 나는 밤마다 화가 났다. 아침마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일어났다. 그런데도 그
노래를 멈출 수가 없었다. 대체 누가 들으라고 하는 노래인가. 쉬잇……. 쉬잇……. 엄마, 그게 다는
아니야. 알지도 못하는 채로, 멈출 수가 없어서 노래를 했다. 쉬잇……. 쉬잇……. 언젠가는 이
소리가 저 바다를 재울거야. 이 작은 소리가, 이 작은 소리가.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수는
없지만, 내가 그 소용돌이를 재워줄께. 엄마, 내 노래를 들어. 이 노래를 들어. 쉬잇……. 쉬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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