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9 번 글: 어머니, 나의 어머니 1 |
| 글쓴이: 이민화 |
글쓴날: 2002년 11월 18일 00시 38분 |
읽은수: 2857 |
때때로 당신을 생각하면 마음이 고즈넉하게 슬퍼 오기도 합니다. 당신은 늘 당신의 울타리 안으로,
안으로 저를 불러들이려 했었지요. 저는 당신을 만나던 첫 날부터 그 울타리 안의 사람이 아니었는데
우리는 어떻게 이토록 오래 이 질긴 끈의 양쪽을 잡고 세월의 터널을 통과하게 된 것일까요.
처음에 당신을 알았을 적에 제게 당신은 너무나 명민하고 야무진 사람이어서 당신이 하는 말은
무엇이든 옳고 당신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반듯하게 보였지요. 그런 당신이 늘 한정된 공간 안에서
같은 일만 반복하고 있었으므로 저는 항상 당신이 안스럽고는 했어요. 당신은 친구도 별로 없고
가족과도 별로 가깝지 않은 것처럼 보였어요. 저는 가난하고 작아진 당신에게 무언가 기쁨을 주고
싶었어요. 제가 제 일을 잘 해내는 것이 당신에게 기쁨이 되면 그렇게 하고, 제가 항상 명랑한 것이
당신에게 기쁨이 되면 그렇게 하고, 제가 예쁜 것이 당신에게 기쁨이 되면 그렇게 해 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다른 사람과 만나 즐겁다고 해도 당신이 곁에 있어 달라 하면 좀처럼 거절할 수가
없었고, 제가 빈 방에 고요히 있고 싶어도 당신이 제 방에 물건을 갖추어 두고 싶어하면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당신이 어딘가 가라 하면 못 간다고 차마 말이 나오질 않고, 당신이 무언가 참으라 하면
아무리 괴로워도 화를 낼 수가 없었어요. 행여 당신이 나 때문에 괴로워할까 생각하면 당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은 시작할 수가 없고, 당신이 화를 내면 늘 가슴이 너무 아파서 오래도록 넋을
잃고는 했어요.
어느 날 제 곁에 누군가가 찾아왔어요. 저더러 무엇이든 잘 하라고 하지도 않고, 항상 웃으라 하지도
않고, 예뻐지라 하지도 않고, 제가 떠들썩하게 누구를 만날 때에도, 제가 빈 방에 틀어박혀 있을
때에도, 제 편이 되겠노라 하는 누군가가 찾아왔어요. 그리고 한참 그 사람은 정말 제 편이 되어
주었어요. 제가 어디를 가도 항상 제 곁에 있고, 제가 턱없이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도 제가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어요. 당신은 그 사람을 싫어하셨지요. 왜 였을까요. 당신은
그 이유를 아시나요. 당신은 그저 저를 빼앗긴다고 생각하셨나요. 저는 내내 당신 곁에 있었는데 왜
오히려 제게서 한 발짝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이를 그토록 못 견뎌 하셨나요. 당신은 제게서
그 사람을 떼어놓을 수 있다면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그 사람이 제 곁에
있고, 당신이 그를 제 곁에서 떼어놓고야 말 것 같은 결연한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저는
한없이 낮은 목소리로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었어요. 겁 내지 말라고. 제가 여기 있다고. 제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고. 저 남자가 제 곁에 있다고 해서 제가 어디 가는 것이 아니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말, 하고, 싶었, 는데, 아,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면 무언가 제 안에서,
울컥, 하고, 터질 것만 같아서,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아무, 말도, 바보처럼,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바보 같은 수가 있을까, 세상에서 네가 제일 바보야, 스스로 한없이, 한없이, 되뇌이는
날들, 내내, 아무, 말도, 너는 바보야, 너는, 아무, 말도, 어떻게, 그렇게……, 나날이, 가고, 달이
차고, 기울고, 계절이 바뀌고, 너는 어떻게, 세상에서 네가, 너 같은 바보는, 없을, 거야. 두 사람
사이에서 모든 것이 다 제 탓이던 날들이 가고, 가고, 또 가고, 저는 그 날들을 보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사람의 가족이 파산하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어요. 이 바보야, 똑똑한 게 다
무슨 소용이야, 명랑한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렇게 한 마디도, 물끄러미, 못하고, 물끄러미 보고
있었어요.
당신은 모르셨을 거예요.
한두달에 한 번씩 제가 몹시 앓았다는 것을. 그런데도 당신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때로는
무연히 무언가 일을 하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는 했어요. 당신에게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몰라서.
만난 첫날부터 한 번도 저버릴 수 없었던 당신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저는 그렇게 오래오래 앓다가 더 앓을 힘이 없어 그 사람더러 떠나라 했어요. 그리고 그 사람더러
이제 앞으로는 모르는 사이인 것으로 하자고 하던 그 날 저는 제가 그 이후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하더라도 제 자신 앞에서는 늘 바보일 거라는 것을 알았어요. 앓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할 줄
모르는, 엄두도 못 내는, 무엇이 그토록, 겁 많은, 바보일 거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나서 다시 한참 시간이 흘렀네요. 뒤늦게 제가 당신에게 거절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고도
한참 시간이 흘렀네요. 당신 앞에서 입을 떼지 못 해서 너무나 치명적인 것을 잃었는데 이제 와서
당신이 원하는 것들을 하나씩 거절한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일까 중얼거리며 보낸 날들이 벌써
이만큼 흘렀네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제가 당신을 미워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저는
정말로 바보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보 같지요. 요즘은 때때로,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 사람이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까지도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스스로 '이제는 더 망가질 것도 없어,' 중얼거리다 말고, 멍해진 머리로 비로소 알 것 같았어요.
당신의 자리에서, 당신의 눈으로 저를 보면, 당신은 저를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한 부분
밖에 볼 수가 없다는 것을. 당신더러 저를 이해해 달라 말하고 나면 이제 저는 우리 둘의 목숨보다도
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미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러 버렸고, 저는 당신 대신 다른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 그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이제 때로 당신이 싫어한다고 해도 제 몫의 삶을 살려고 해요. 하지만,
동시에 당신, 당신이 지금 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머니,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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