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나라 주제게시판

수다떨기(여성전용)   수다떨기(누구나)   뉴스 게시판   여성학게시판  

167 번 글: 난다씨와의 대화 -- 생활의 지혜 12. 전화
글쓴이: 무넝이 글쓴날: 2002년 07월 22일 00시 55분 읽은수: 9053
12. 전화

이난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냐고 사람들이 묻곤 한다. 일주일에 한번 가는 부모님 집에, 자주 전화기를 두고 온다. 내가 사는 곳에는 따로 전화가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기분이 이상했다. 문이 꼭 닫힌 조그만 상자같은 집에 누구에게 연락할 방도도 없이 갇혀 있구나, 라는 기분.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렇지만 전화기 없이 지내는 몇 주일 동안 나는 '정말로 조용'한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가 전화기를 갖고 있을 때, 전화를 의식하진 않더라도, 언제라도 전화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우리의 무의식이 알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마음을 조용'하게 해줄 수 없다. 없으면 생활이 단순해진다. '정말로 중요'한 연락은 사실 그리 많지 않고, 그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면 어떻게든 오게 된다. (1024)

--------------------

무넝이

혼자 산 지 5년이 넘는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 방에는 TV가 없다. 혼자 살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TV가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장만하지 않았는데 거기 익숙해지고 나서는 TV와 함께 사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운 일일 것 같았다. 회사원이 되고 나서도 나는 TV 없이 산다. 혼자 사는 방에 TV도 없으므로 집에 있는 시간엔 내가 어디 전화를 하지 않는 한 사람 목소리를 듣는 일이 없다. 처음에는 그것이 힘들었다. 이제는 거기 익숙해져서 라디오도 잘 듣지 않는다. 그저 말상대를 만들기 위해 길게 전화하는 일도 처음보다 줄어든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음악을 튼다. 저녁에 귀가해서도 먼저 음악을 튼다. 음악도 비슷한 음악을 싫증날 때까지 반복해서 듣는 것이 보통이다.

말소리 없는 방에서 사는 일은 단식과 비슷하다. 나는 단식을 해 본 적이 없다. 두 끼만 굶어도 견디기 어려운데 며칠 단식을 하면 어떨까 싶다. 단식을 해 본 사람들은 며칠 계획을 세워 단식을 하면 온 몸의 노폐물이 밖으로 빠져 나오고 몸이 가벼워진다고 한다. 나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친숙한 사람들과 만나면 수다 떠는 즐거움 때문에 이야기를 많이 하고 어색한 사람들과 만나면 어색함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이야기를 많이 한다. 가족과 함께 살 때 나는 사이가 좋으면 좋아서 할 말이 많았고 나빠지면 화해하기 위해서 계속 떠들었다.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말을 많이 하면 내가 남의 말과 행동으로 받은 크고 작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시간을 갖기 어렵다는 것을 몰랐다. 말을 많이 하면 남의 말에 곰곰이 귀를 기울일 시간을 잃게 된다는 것을 몰랐다.

상대가 면전에 있을 때, 나는 여전히 말수가 적은 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아침저녁의 침묵 속에는 한 주는 PET 병 시장에 대해, 그 다음 주는 농약 시장에 대해, 그 다음 주는 합성세제 원료 시장에 대해 조사해야만 하는 직장생활을 견디게 하는 빈 공간이 있다. 내 집은 방 한 칸 짜리이지만 그 방은 침묵으로 텅 비어 있어 커다랗다. 그 방의 침묵이 때로 몸부림치는 내 마음을 안고 있다.
목록보기 이전글 다음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