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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번 글: 난다씨와의 대화 -- 생활의 지혜 10.쓰레기
글쓴이: 무넝이 글쓴날: 2002년 07월 22일 00시 56분 읽은수: 12055
10. 쓰레기

이난다

쓰레기는 모여도 걱정, 안 모여도 걱정이다. 쓰레기를 줄이려고 노력하면서도, 오래된 쓰레기를 집에 쌓아두고 있으면 영 찜찜하다. 오늘 과일들을 한 짐 사서 지고 올 때, 그것을 먹는 기쁨에 곧바로 이어, 이걸 다 먹고 나면 음식물 쓰레기 한 봉투 채워 버리겠지, 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만 왜 나는 쓰레기와 함께 살기를 힘들어 할까. 결국은 내가 그걸 다 만들고 있으면서. 그것들도 한 때는 쓰레기가 아니었는데.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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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넝이

거래처 사람들과 저녁 먹을 일이 생긴다. 거래처 사람들이 아쉬운 입장에 있는 경우여서 우리쪽 담당자 다섯 명은 근사한 저녁을 얻어 먹는다. 안주가 좋아서 그런지 아니면 회사 생활 3년에 이제는 여유가 생겨서인지 나는 평소보다 훨씬 술을 잘 마신다. 사실 친구들 사이에서 술 약한 사람의 대명사와 같았는데. 이제는 저녁 내 “상냥한 척”해야 하는 것도 덜 피곤한가 보다. 오십세주를 댓 잔 마셨는데도 조금도 어지럽지가 않다.

저녁을 먹고 저쪽과 이쪽의 부서별 담당자가 소그룹으로 나뉘는 분위기가 된다. 나와 내 사수는 처음에는 헤어지려고 하다가 결국은 회사 근처의 양주집으로 이차를 간다. 사수는 일차는 우리가 얻어 먹었으니 이차는 자기가 낼 생각인 듯 하다. 내가 굳이 그 집을 “양주집”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가격도 무슨 단란 주점만큼 비싼 것도 아니고 젊은 아가씨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무슨 칵테일 바처럼 환하고 세련된 분위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는 나도 전에 팀 회식을 할 때 따라간 적이 있다. 사수가 좀 취했는지 어지러워 하고 그 집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므로 나는 신참 구실을 하느라고 앞장서서 쪼르륵 그 집으로 일행을 안내한다.

무슨 술을 시켜 놓고 우리는 업무랑 관련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저녁을 여섯시부터 먹어서 그런지 여태 시간은 아홉 시 전이다. 여기 마담 “언니”는 한 마흔 댓 되어보이는데 늙었다기 보다는 삭아 보이는 인상이다. 다른 “언니”들은 삼십대 같기는 한데 역시 주택가에서 흔히 만나는 아주머니들보다 훨씬 삭아 있다. 피곤해 보이는 것이 하루이틀의 피로가 아닌 것 같다 해야 할까. 친절한 데도 동시에 심드렁해 보인다 해야 할까.

다른 세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주로 듣는 것이 내 역할이다. 상대방 쪽 담당자는 자기네 회사의 홍보 정책이 원래 매스컴의 주목을 받지 않도록 하는 거라는 둥, 앞으로 신상품인 “**”이 회사 전체의 수익성을 높일 거라는 둥, 솔직히 우리가 “쪽발이”보다 못할 게 뭐가 있냐는 둥,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 고참은 거기다 대고 잘 안다는 듯이 또 뭐라고 하고 있는데 맞는 말 같기도 하고 틀린 말 같기도 하다.

우리 자리는 가게의 구석이고 내 자리는 그 중에서도 구석 자리이다. 내 자리에서는 대각선으로 건너편에 앉은 사람들이 잘 보인다. 안 보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대각선으로 건너편에 앉은 사람들은 우리보다도 훨씬 더 취한 것처럼 보인다. 내 자리에서 정면이 보이는 통통한 아저씨는 여기 한 “언니” 무릎 위에 앉아 있다. 나는 잠시 흠칫 놀란다. 표정으로 보아서는 그러고 있는 것이 상당히 즐거운 것 같다. 사춘기에 막 접어든 아이가 장난기가 가득 묻어 있을 때 저런 표정일까. 하지만 눈빛이 또렷하지 않은 그 얼굴에서는 맑은 빛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지만 큰소리로 껄껄 웃는 간격이 잦다. 너무 잦아서 이야기를 듣고 웃는 것이 아니라 술기운에 웃는 것처럼 들린다. 마담 “언니”는 내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데 그 옆의 누군가는 언제부터인가 치마 밑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만지고 있다. 나는 입술을 깨문다. “언니”는 그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해서 심드렁한 표정인데도 다른 사람들이 웃으면 같이 웃는다. 웃음소리에는 “언니”의 목소리도 섞여 있다. 놀랍게도 그 풍경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무엇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모두 웃고 있는데 나는 그 “자연스러움” 때문에 마음이 스산하다. 이토록 “등장 인물들이 서로 잘 어울리는” 풍경이 내게는 왜 추하게 보이는 걸까. 마음이 스산해서 정작 우리 테이블의 이야기는 맥을 놓친다. 순간, ‘이 집도 저런 식으로 영업을 하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지만, ‘여기도 엄연히 여의도의 술집인데 저런 것 없이는 장사를 할 자신이 없겠지.’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서…….

뭐랄까, 사람이 사람의 무릎 위에 앉을 때는 저런 표정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뭐랄까, 누군가 이성의 다리를 만질 때는 저렇게 웃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저렇게 신산스러워 보이는 여자들과 저렇게 중학생처럼 짖궂게 놀고 있는 남자들이라니……. 아직도 그들에게 여자란 그저 신기하고 그러면서도 하찮은 존재로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저만큼 나이를 먹고도 아직 그 자리에 그렇게 머물러들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이 실제로 중학생이었으면 차라리 덜 씁쓸했을 것 같다.

그러나……, 서른 다 되어 이제 내게 놀랄 일이 뭐 그리 많이 있겠는가. 저럴 수도 있는 것이겠지. 아닌 말로, 술을 마실 때 여자들끼리 몰려 다니며 남자를 만지는 것이 이 세상의 대세였다면 나 역시 그런 자리에서 매번 빠졌을까. 혐오한다 말 하면서 때때로는 따라 하고 따라 하다 보면 즐거워지지 않았을까.

자리가 파하고 저쪽 담당자들은 굳이 나를 집에 보내고 자기들끼리 어디론가 갈 모양이다. 더 있기도 싫던 차에 잘 된 일이기는 하다. 지금 10시 반이니 너무 늦지도 않고 딱 좋다. 그러나 날 보내고 셋이서 무슨 긴한 일이 있는 것일까. 아까 저녁을 먹다가 상대방 측의 누군가가 “남자가 1시까지 들어오면 술을 좋아하는 거고, 2시에 들어오면 뭔가 다른 걸 좋아한다고 생각하니까 1시 넘기면 아내가 화를 낸다.”고 했었지. 그래서“2시에 들어오는 남자는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겠지요.”하고 받아 넘겼었지. 사실 그렇잖아. 1시고 2시고 그 시간 차이를 가지고 무언가 상상을 하고 상상을 해서 화를 내야 하는 삶이란 얼마나 비루한가. 자기 삶 하나도 버거운 판국에 자기 곁에 선 남편에게 아내 된 의무로 기숙사 사감 같은 표정을 짓기도 하다가 성난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짓기도 해야 한다면 그건 너무 지치는 일 아닐까. 나 같으면 그런 식으로 몇 시인가를 따져서 무언가 열심히 상상을 하고 상상을 가지고 화 내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화 내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그게 아내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남편이 너무 우스워서라도. 하지만, 그래, 오늘은 그대들의 관행 앞에서 내가 백기를 들어 주마. 아직 지하철도 끊기지 않았는데 내가 왜 거래처 담당자에게 택시비를 얻어 받아 집에 가야 하는가. 당신들은 지금 영문도 모른 채 나에게 조금 미안한가 보지. 하지만, 그래, 내가 성 내어 거절하지 않으마. 당신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는 것으로 해 두자.

어쩌면 나는 벌써부터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화도 안 내고 있으니, 아파하지도 않고 있으니. 세상에서 일하고 돈 벌어 살아가는 동안 나는 사막의 바위처럼 조금씩 풍화되겠지. 한 때는 내 삶을 참나무 묘목을 곧게 키우듯이 그렇게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나는 빈 방에 돌아와 앉아 내게서 무언가 부스러져 내리는 이 시간이 삶의 필연인지 아니면 내 의지박약의 소치인지 혼란스럽다. 한 때는 내 곁에는 쓰레기를 두지 않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내게서 무언가가 소리없이 야금야금 이렇게 부스러져 내리는 데 어쩌랴. 자정이 넘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 나는 반듯하게 살 일을 꿈꾸는 대신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내 안에서 자꾸만 부스러져 내리는 이 무엇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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