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번 글: [^^] 페미니스트 아니라 영페미니스트 |
| 글쓴이: 신딸기 |
글쓴날: 2000년 05월 09일 09시 16분 |
읽은수: 6711 |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그 영페미니스트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는 ... ^^;;;;
[열린삶] 페미니스트 아니라 영페미니스트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문제와 원조교제를 같은 선상에서 얘기하는 것은…여성은 아파트가 아닙니다. 여성은 남성이 가질 수 있는 재산이 아닙니다. 이 얘기들 듣고 여성들은 모욕감을 느꼈으며 우리 사회 남성들의 일상화된 매춘의 욕망을 절감했습니다.…”
지난 2월25~28일 제주도에서 `제주인권학술회의'가 열리고 있는 동안 강의실 앞에 나붙은 대자보의 일부다. 내로라하는 인권운동가와 진보적인 학자들이 모여 인권을 논의하는 자리에 이런 내용의 대자보가 붙은 사연은 이렇다. 대회 첫날 발표에 나선 한 남자 교수가 인간의 끝없는 욕구를 설명하면서 “20평에 사는 사람은 50평에 사는 사람을 질투하고 부러워하고, 애인이 하나 밖에 없는 사람은 원조교제를 부러워하고…”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즉각 문제제기가 이뤄졌고, 그날 밤 한 방에 모인 10여명의 여성 참가자들은 대자보를 붙이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 뒤 인권운동가들의 `인권 감수성에 민감하기, 자기 성찰하기'를 촉구하는 `영페미니스트'들의 제안을 환영하는 대자보가 잇따라 나불었다. 이 `대자보 논쟁'은 “가부장제의 내면화로 인해 일상에서 너무 쉽게 성차별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또 하나의 문화 이정주 사무차장) 우리 사회의 진보적인 남성들을 향해 영페미니스트들이 처음으로 직접적이고 공식적인 문제제기를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영페미니스트 그룹은 90년대 중반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하나둘씩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학생운동권의 남성 중심성과 가부장성을 강하게 비판하고, 거대담론보다는 일상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이들에게 운동은 희생을 강요하는 괴로운 일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즐거운 일이다. 자기를 학대하지 않고 어떻게 즐겁게 싸울 것인가에 큰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투쟁방식도 다르다. `재미없는' 대규모 거리집회는 이들의 취향이 아니다. 각종 축제와 문화제, 퍼포먼스 등 문화 이벤트가 그들이 애용하는 투쟁방식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대학가에 유행처럼 번졌던 성정치문화제, 페미니즘문화제, 여성제 등을 기획하고, 96년엔 `의례적인' 고대생들의 이대 대동제 난동사건을 집단 성폭력으로 규정한 데 이어 98년엔 지하철 역사를 떠돌며 게릴라식으로 성추행 방지 퍼포먼스를 벌여 지하철공사의 항복 선언을 받아낸 것도 그들이다. 지금도 지하철에서 들을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동을 하면 법에 의해 처벌받을 수도 있다”는 안내방송은 그들의 게릴라전의 전리품이다.
이들은 부계제에 저항하는 의미로 새로운 이름(별명)을 부르고, 나이의 차이를 무시하기 위해 학번을 따지지 않고 반말을 한다. 또 위계질서를 없애기 위해 조직의 대표를 따로 두지 않고, 회의는 수다로 한다. 꽉 짜여진 조직틀을 거부하고, 사안별 연대를 통해 `치고 빠지기식' 운동을 한다. 이런 실험적 특성 때문에 게릴라 페미니스트로도 불린다.
대학가에 처음 그 존재를 알린 뒤 5년여가 지난 지금 이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해졌다. 이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영역은 `여성적 글쓰기'다. 98년 창간돼 1년에 두차례 여성주의 잡지 <두입술>을 펴내는 연세대 여성자치언론 `두입술'과 지난 98년 서울대에서 여성운동을 하던 `관악여성모임연대' 출신 졸업생들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페미니스트 웹진 <달나라딸세포>(dalara.jinbo.net)가 대표적이다. `두입술' 출신 졸업생들은 여성주의 활동을 어떻게 사회에서까지 이어갈까를 고민하다 사이버 공간에서라도 여성들이 자유롭고 편안한 커뮤니티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의 상상이 즐거운 세상 언니네>라는 웹진을 만들었다. <두입술>과 <달나라딸세포>의 몇몇 회원은 지난해 30대이면서도 영페미니스트의 감수성으로 다양한 문화 이벤트를 기획해온 이숙경 서울시립대 강사와 함께 영페미니스트 기획집단 `달과 입술'을 만들었다. 이들은 첫 작품으로 지난 3월 말 <나는 페미니스트이다>를 펴냈다. 이 책에서 그들은 “우리는 아름다운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들”이라고 선언한다.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영역이 사이버여성주의다. 지난 3월 말 이대 앞 페미니스트 카페 고마에서 열린 온라인 성폭력 토론회에 모인 사람들이 만든 `시스터 본드'(sister bond)는 사이버공간에서 여성을 배제하거나 여성에 적대적인 토론문화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 현재 `반(反) 사이버 마초(근육질의 공격적인 남성을 뜻하는 말)테러' 운동을 위한 웹 사이트를 준비중이다.
졸업할 무렵이면 운동을 정리하는 선배 운동권들과는 달리 이들은 운동을 삶과 분리될 수 없는 평생의 과업으로 여긴다. 이를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가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적 자립이다. 지난 98년 백조(여자 백수)들이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만든 여성경제네트워크 `프리-워'(FReE-War)는 `Feminist Revolution in Economy War'의 약자로 경제적 자립을 꿈꾸는 여성들의 자조모임이다. `프리-워'는 96년 고대생들의 이대 대동제 난동 사건 때 모인 각 대학 여성활동가들의 모임인 `들꽃'과 그 구성원들이 졸업한 뒤 만들어져 지하철 성추행 방지 퍼포먼스로 잘 알려진 `돌꽃'의 구성원들이 주축이 돼 만들었다. 말하자면 영페미니스트 그룹의 `적자'인 셈이다. 이들은 올해 초 서울시 여성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번달 1일부터 홈페이지(www.freewar.or.kr)를 열고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구인구직 게시판과 직업 경험담, 월급계산법 등 취업을 원하는 여성들이 알아야 할 정보를 중심으로, `왕초짜 금융정보', `기죽어 있지 말고 나와서 힘다지기'를 위한 내공 업그레이드 프로그램 등이 올라와 있다. 그런가 하면 아예 외부의 투자를 받아 벤처기업을 만들기도 한다. 여성포탈 사이트를 구축하고 있는 벤처기업 `우먼 웨이브'는 영페미니스트들이 처음으로 시장에 진출한 경우다. <달나라딸세포>의 몇몇 회원들도 웹 인큐베이팅회사에서 투자를 받아 `수다넷'이라는 여성포탈을 준비하고 있다.
대학 안의 영페미니스트 운동은 주로 각종 여성자치모임 형태로 나타난다. 현재 자치모임이 가장 활발한 연세대의 경우 10개 안팎의 자치모임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학교 담장 안에만 머물지 않고 연대를 통해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지난해 9월 고려대에서 열린 `월경페스티벌'은 고려대, 서울대, 서울시립대, 연세대 등 4개 대학 연합 여성문화기획팀인 `불턱'과 30대 여성주의자들이 함께 만든 축제였다.
영페미니스트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기존여성운동과 자신들의 차이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기존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세력으로만 비춰지는 것이다. 이들은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연결고리를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여성단체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동등한 관계에서 연대하는 것이 더 장점을 발휘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운동을 하다보면 소동을 일으키는 사람도 필요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제도화를 하는 사람도 필요하다. 우리는 기존 여성운동의 틈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갈 것이다.” 성균관대 총여학생회장 출신으로 `들꽃', `돌꽃' 모임을 거쳐 `프리-워'에서 활동종인 권김현영(25·이대 여성학과 대학원)씨의 말이다.이종규 기자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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