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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 번 글: '폭탄주 정치'와 여성의원/ 권인숙
글쓴이: 차차 글쓴날: 2001년 07월 22일 22시 49분 읽은수: 34993
편집 2001.07.18(수) 19:34


'폭탄주 정치'와 여성의원/ 권인숙



논문을 쓰기 위해 19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여성들을 1998년에 만났었다. `군사문
화' 하면 떠오르는 것 등의 질문을 했을 때 한 사람은 `폭탄주'라고 대답하면서 이
렇게 말했다. “우리 지도교수도 폭탄주를 아이들한테 먹이거든요. 굉장히 남성중심
적인 것 같다는 느낌도 들고요. 거절할 수가 없어요. 돌리면 먹어야 하고, 너무 싫
더라구요. 폭탄주를 다섯 잔씩 먹곤 했어요. 핑돌지요. 곤욕스럽더라구요.” 다른
맥락에서 당시 신문사 기자로 일했던 여성은 이렇게 말했었다. “그때까지는 여기자
는 문화부·생활부에만 모여있고, 그런 것을 깨기 위해서 일부 과감한 여자들이 나
만해도 폭탄주를 7-8잔씩 마시니까, 그렇게 살았죠. 인정받기 위해서, 안먹어도 되
지만, 신문사도 강하고, 일이 힘들고, 기득권이 세고 이런데 일수록, 그게 아주 센
거죠. 신문사 같은 경우가 버티려면 폭탄주는 할 수 있어야 하고…”

강제적으로 모두 같이 취하고 보자는 획일적 강요문화의 적절한 도구로서 한편으로
는 남성들이 주류를 이루는 특권화된 사회에 속하려는 여성들의 상징적 수단으로서
이용되는 폭탄주의 복합적 의미가 엿보이는 대화였다.

추미애 의원의 이른바 취중욕설의 소란한 논란을 대하면서 폭탄주에 관한 이들 대화
가 먼저 떠올랐다. 당대표와 저녁 모임에서 폭탄주 다섯잔이 돌았고, 이후 신문기자
들과 만남에서 폭탄주 두잔이 돌려졌다고 했다. 돌리면 마셔야 하는 폭탄주의 성격
상, 브리핑에 남은 추 의원을 포함한 세 의원들은 7곱 여잔의 폭탄주를 마셨다는 이
야기가 된다. 우선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와인 한두잔도 아니고, 모두다 강제적으
로 술에 취해 정신이 나갈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라는 폭탄주가 오고가는 자리가 왜
기자들이 브리핑을 기다리는 공식적인 정치모임의 자리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가 없었다. 기자들에게 브리핑을 해줄 정도의 진지하게 정치현안을 논의하는 모임이
라면 애당초 그런식의 폭탄주가 오고가서는 안되었고, 폭탄주가 오고간 자리라면 모
임이 있었다는 정도 이상의 내용까지 사람들이 시시콜콜히 알아야할 이유가 있었을
까. 그렇게 술을 모두다 취하자는 분위기로 마시는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가 정치의
본론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도 우습고, 이런 식으로 토론되는 것이 정
치 일상의 한 부분이라면 술이 세지 못한 사람은 온전한 정신으로 정치도 못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술이 취해 나온 사람들을 붙잡고 브리핑을 하자고 하고 그 자리에서
또 폭탄주가 돌고, 그 와중의 해프닝이 우리나라 최고영향력의 신문 1면을 장식했
다. 박정희 대통령 같이 술자리에서 암살 당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성의원으로 산다는 비애에 마음이 답답해진다. 평소 술이 얼마
나 센지, 또는 즐기는지 알 수 없지만 남성들이 만들어 오고, 주도하는 국회의원그
룹 속에서 튀지 않기 위해서라도 또는 남성의원들과의 동류의식을 보여주기 위한 적
절한 수단으로서 폭탄주를 거부하지 않았을 추 의원. 유독 여성의원으로 구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왔고 남성의원도 부러워할만한 주류의 정치인이다. 그러나 추 의
원의 폭탄주에 흩어진 모습과 발언은 여성이기 때문에, 그 유순한 여성적 이미지 때
문에 사람들에게 더 적절치 않아 보이고, 그것이 최근의 언론과 이문열씨에 대한 비
판에 덧붙여져 신문 1면으로까지 올라갈 가치를 배가 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여성의
원이기 때문에 이런 취중욕설보도 이후 더 큰 상처를 입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
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폭탄주 정치에서 이래저래 약점이 많은 여성정치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죽자고 마셔서 술부터 세져야 하나, 아니면 폭탄주 정치를 거부하
는 튀는 길을 가야 하나. 그리고 맨 정신과 술 취한 정신이 구별없이 이루어지는 정
치와 이에 대한 구별없는 보도를 언제까지 당연하게 여겨야 하나.

권인숙/사우스플로리다주립대 교수·여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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