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번 글: [하니 리포터/오조영란] 엄마의 도시락과 무보수 노동 |
| 글쓴이: 신딸기 |
글쓴날: 2000년 05월 09일 09시 06분 |
읽은수: 6149 |
아래 글과 마찬가지로.. 인터넷 한겨레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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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조영란] 엄마의 도시락과 무보수 노동
네 엄마가 아니다!: 엄마의 도시락과 무보수노동
오래 전의 일이다. 캐나다에 사는 육촌(당시 10대)이 한국에 연수를 왔다. 그애와 얘기를 하다가 우연히 오촌아주머니가 아침에 애들 도시락을 싸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각자 샌드위치를 만들어 싸가지고 학교에 간다는 것이었다. 쯧쯧... 시상에! 아무리 직장생활을 하는 숙모지만 어찌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도시락을 싸주지 않는단 말인가! 자식들 뒷바라지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한국엄마의 이미지에만 익숙했던 내게는 단 한번 본 적이 있는--게다가 '상냥함'과는 거리가 멀기까지 한-- 그 숙모가 아주 '이상한 여자'로 여겨졌다.
그런데 한참 뒤 내가 직접 캐나다에 와서 보니, 이곳 십대들은 대부분 직접 도시락을 만들어가지고 오거나 학교카페테리어에서 사먹거나 한다. 식빵 사이에 피넛버터와 잼, 또는 피넛버터와 바나나, 아니면 햄과 치즈 등을 넣어 만든 샌드위치에 사과 오렌지 바나나 같은 과일 하나 싸가지고 와서 점심을 먹는다. 숙모네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정성어린 도시락을 싸주지 않아도 애들이 잘 크는구나... 시상에!
(학생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직장인 가운데도 '셀프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다니는 대학에서도 학생들뿐 아니라 교수들도 마찬가지 수준의 도시락을 가져와 먹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다.)
지금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 엄마에게도 도시락 싸는 일은 '큰일'이었다. 늘 이른 아침에 가족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야 했고 매일 도시락을 최소한 서너 개씩 싸야 했다.
가정에서 엄마의 역할과 지위를 생각해보면, 아직도 많은 경우 한 집안의 가사일 전부 또는 대부분을 수행하는 존재가 엄마이다. 엄마가 거의 전담하는 육아와 가사노동은 무보수이지만,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고들 한다. 엄마란 당연히 그런 존재로 여겨지고, 도처에서 보고 들리는 그러한 기대로 해서 많은 엄마들 자신도 그런 역할을 당연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엄마 한사람의 등짝에 온가족의 가사노동의 부담을 지어버리는 가족들은 얼마나 뻔뻔한 존재인가.
세상이 많이 변했으니 요즘 엄마들은 좀 나아졌을까? "아무래도 좀 나아졌겠지..."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어떤 면에서 요즘 엄마들은 문제가 더 심각한 것같기도 하다.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기 시작한 친구들이 가장 갈등을 일으키는 것 중의 하나는, 학교에서 --종종 선생님을 매개로 해서-- 학생의 어머니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매일 챙겨가야 하는 아이들의 준비물을 장만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교실미화, 각종 '행사참여', 금전적 지원 등 학교의 뒷바라지를 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성 학부모에게 무보수로 일하는 '학교의 엄마' 노릇을 해줄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그래도 애정과 양심이 있는 가족들끼리라면 설득을 통한 민주적인 가사분담에로의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아 보인다. 반면, 학교나 다른 조직에서의 '엄마노릇' 기대는 너무나 강해서, 이를 겪는 여성 개인이 바꿔갈 수 있을 것같이 보이지 않아 무력감과 절망을 경험하게 한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의 경우 저학년 교실의 청소를 해줄 사람이나 급식을 만들어 배식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고용하라고 배정된 예산은 없다. 학교는 '당연히' 학부형이 담당해주기를 요구하며, 이 때 '학부형'은, 백이면 백, 엄마들이다. 직장 생활을 하거나 안 하거나 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엄마 '학부형'은 자신의 의향과는 무관하게 초등학교의 뒷치닥거리가 떠맡겨진다. 학교라는 사회에서의 '엄마노릇'에 대한 기대에 맞추자니 금전적·시간적·육체적·심리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말이 아니고, 그 기대를 거부하자니 어린 자식의 교육을 맡긴 엄마로서 맘이 편치 않다.
흔히 엄마들이 가정에서 어린이 돌보기나 뒷치닥거리 등을 무보수로 전담하듯이, 집밖 사회는 여성의 돌보기나 뒷치닥거리 등 보조적인 일을 무보수로 수행해줄 것을 강요한다. 가정 안이건 밖이건 간에, '엄마'이거나 또는 '잠재적인 엄마'로 여겨지는 여성은 자기자신보다는 다른 구성원을 먼저 생각하고 다른 구성원을 위한 일을 우선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반면, 여성의 현실은 어떤가? 현재 기혼여성의 50%가 돈버는 일, 즉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또 직장이 없는 다른 여성들도 보수를 받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너무나 당연하게 '엄마=전업주부=무료 뒷바라지 당근!'의 등식을 강요하고 유지한다. 가사일과 직장일의 이중부담에다가, '사회엄마' 역할까지 요구받는 삼중의 부담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쪽에서는 지독히도 풍요롭게 돈이 넘쳐나는데 반해, 또다른 쪽에서는 창피할 정도로 돈이 부족하여 특정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무보수 노동을 강요하는, 강요할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그리고 무보수 뒤치닥거리 일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우리나라... 이렇게 심한 격차와 불평등이 유지되는 나라는, 박노자씨의 지적대로, 실은 '못 사는' 나라이다.
초청칼럼니스트 오조영란mizhaema@hani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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