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번 글: [하니 리포터/오조영란]우리가 파리가?: 쏜힐 등이 '강간'이라고 부르는 것 |
| 글쓴이: 신딸기 |
글쓴날: 2000년 05월 09일 09시 04분 |
읽은수: 6255 |
인터넷 한겨레에 칼럼을 쓰시는 오조영란님의 칼럼을 퍼온 것입니다. 재미있으니까 끝까지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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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조영란] 우리가 파리가?: 쏜힐 등이 '강간'이라고 부르는 것
<<경고: 이 글에는 독자에게 구토를 일으킬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계속 읽을 것인지는 각자의 판단을 따라 주십시오.>>>
인간은 인간으로서 인간의 행태(behaviors)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 특히 그것이 남녀간의 차이에 관한 경우, 연애의 지혜에서 성차별의 합리화에 이르는 응용가능성(?) 때문에 더욱 더 큰 관심이 집중된다.
이러한 큰 관심으로 인한 부작용도 없지 않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대하여 대중매체의 각별한 관심이 쏟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럴 경우, 그것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과학'의 이름을 갖다 붙이고, 다원적인 설명보다는 눈길을 끌 수 있는 단순한 환원주의적 설명을 하는 경우가 많다.
또 '언론'과 '과학'이라는 두 강력한 제도의 결합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주장의 '과학적' 증거가 타당한가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기보다는, 그것이 불충분/부적절/헛소리일 경우에도 그 결과를 사실인양 받아들이게 하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이 방면, 즉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사회생물학에서 가장 흔한 유형은 곤충, 지렁이, 원숭이 등과 같은 어떤 한 종류의 동물에서 발견된 암컷과 수컷에 대한 관찰을 인간 남녀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동물행태에 대한 관찰이나 실험을 묘사하는 데에 '강간', '매춘', '이혼', '간통'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일은 흔하다. 이와같이 동물행태를 의인화를 함으로써, 한 종의 생물에서 일어나는 행태가 인간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고 가정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또 생물과 인간의 모든 행동이 '진화적 생존' 즉 생식만을 위한 것처럼 단순화시켜 설명한다. 즉, 생물의 모든 행동이, 생존을 위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과 다음 세대로의 유전자 유포를 위한 성선택(sexual selection)의 산물이라는 가정을 암묵적으로 깔고 있는 것이다.
지난 2월 미국에서 출간되어 국내외 미디어의 '관심'을 모았던 쏜힐(Thornhill)과 파머(Palmer)의 『강간의 자연사(The Natural History of Rape)』도 이같은 예이다. 이 책의 주제가 발하는 노란 빛깔 때문에, 미국의 티비와 신문들은 앞다투어 저자들을 출현시키고 기사화했다. 그 덕택에 4월 예정이었던 이 책의 출간은 '붐'이 사라지기 전인 2월로 앞당겨지기까지 했다.
솔직히 이 책에 대한 얘기로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없지 않다. 하지만, 우려하던 대로, 이 책에 대한 신문기사를 기억하고는 "MIT의 과학자(실은 잘못 알고 있음)가 그러는데, 원래 남자는 짐승이래요"라고 자신을 비하하는 일부남성들이 생기는 것을 보고서 이 책을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할 필요를 느낀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쏜힐 등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강간이란 근본적으로 생물학적 문제이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강간이란 교미를 해서 자손을 퍼뜨리려는 수컷들의 '진화심리'적인 적응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서, 강간은 수컷들이 생식을 위한 경쟁 속에서 자신의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 암컷과 강제로 교미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 저자들은 자신들이 강간이 긴 진화과정에서의 적응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강간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면서, 강간의 '진정한' 원인을 파악하여야 예방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과학적 강간예방책'으로, '암컷들'에게는 1) 잠재적 강간자들인 '수컷'의 눈에 뜨일 노출이 많거나 꼭끼는 옷차림을 하지 말 것, 2) 수컷에게 당하지 않도록 행동거지를 방정히 할 것, 그리고 수컷들에게는 3) 자신들의 '이론'에 바탕을 둔 강간예방 강좌를 듣도록 할 것 등이 있다.
쏜힐 등의 주장은 결국 '강간은 남성적 성의 자연적 산물이다. 그러나 여성이 조심하기만 하면 피할 수 있다'는 식의 성폭력에 대한 통념, 즉,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피해자들이 싸워야 했던 바로 그 통념을 내포하고 있다.
70년대 후반부터 곤충의 교미에 관하여 논문을 내던 쏜힐은 점차 교미라는 말대신 '강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금 유통되고 있는 '진화심리학'적 강간설은 그를 중심으로 하여 그의 제자 및 공동연구자들(전처 낸시 쏜힐 포함)을 중심으로 주장되고 있다.
쏜힐은 모든 '사회문제'는 기본적으로 '과학자'(생물학자)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인간의 문제인 강간도 동물을 연구함으로써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자신의 경우에는, 전갈파리 연구를 통해서!
200쪽 가량 되는 이 책에서 그가 제시하는 유일한 '과학'으로부터의 증거는 전갈파리((scorpion fly, 외양이 전갈을 닮은 파리의 일종, 아래의 사진 참조 -- 물론 그의 책에 이 곤충의 사진은 실려 있지 않다)에 대한 실험연구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전갈파리는 수컷이 먹이를 먹고 분비한 타액의 고형물이나 다른 곤충의 시체와 같은 먹이(쏜힐은 이를 '혼인선물(nuptial gift)'이라 함)를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페로몬을 발하여 암컷을 유인하고, 암컷이 먹이를 먹는 동안 교미를 한다고 한다. 반면, 암컷을 유인할 먹이가 없을 경우, 수컷은 교미를 할 수 없고 그렇게 때문에 강간을 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1980년 출판된 "전갈파리의 강간"이라는 논문을 보면, 그가 이 가설을 테스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컷 전갈파리에게 다른 곤충의 시체도 넣어주지 않고 4일간 먹이를 주지 않음으로써 타액 고형물을 만들 수 없도록 하여 함으로써 '혼인선물'이 없는 상태를 만든다. 그런 다음 유리용기에 그렇게 준비한 수컷을 암컷과 함께 집어넣어두면, '혼인선물' 없이도 수컷 10마리에 2마리는 교미를 하고, 그 중 절반인 1마리는 수정을 하는 데에 '성공'한다.
새 책에서는 이 실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수컷 '강간범'은 '싫다'는 암컷을 쫓아가 '암컷의 의지(?)에 반하여' 강제로 교미를 한다"는 식으로 의문스런 '실험결과'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서는 난데없이 "자신의 실험들이 밝히는 바, 모든 수컷은 혼인선물이 없는 환경에서는 강간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마치 인류학자처럼, 파리의 세계를 '혼인선물', '강간' '강간범' 등 인간지사의 용어를 사용해 묘사한다. 그는 전갈파리에 대한 묘사로부터 인간의 강간으로 진행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를 못 느낀다. 그래서 그는 전갈파리 얘기와 인간 강간 얘기를 자유롭게 오간다. 예를 들면 '암컷'을 유혹할 외모나 부(富)와 지위가 없는 남성은 수컷 간의 경쟁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강간을 하게 된다는 등.
이외에도, 곤충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바탕으로 한 가설을 인간세계에 맞추려고 잡아늘리다보니, 데이터의 선택적 사용은 말할 것도 없고, 앞뒤가 안 맞는 해석과 알려진 사실들과 모순되는 주장들이 많아, 이를 일일이 지적하기 힘들 지경이다. 몇가지만 예로 들자면, '새끼'를 낳을 수 있는 가임여성이 아닌 어린이(12세미만의 어린이가 강간피해자의 30%), 연로자, 심지어 남자들은 왜 강간당하나? 또 자손을 퍼뜨리는 것과 무관한 오랄섹스나 항문섹스로 이루어지는 강간의 비율이 높은 까닭은? 노출이 심한 옷차림과는 무관하게 청바지를 입거나 차도르를 둘러싼 여성들도 강간을 당하는 이유는? 강간피해자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심하게 해를 입거나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자손을 퍼뜨리려는 적응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 ... ... ...
쏜힐의 가설과 같은 '황색 생물학'이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것이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뉴스위크』같은 주간지에서 배우자의 부정, 남녀간의 성적 매력, 질투, ... 등을 (주로 수컷의) 생식전략으로 다루는 사회생물학적 설명은 단골 커버스토리였고, 쏜힐 등의 '진화심리학'은 신판 사회생물학일 뿐이다. 이런 류의 책들이 서점 진열대 과학부문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러나 대중매체의 조명을 받지 않는 더 많은 수의 진화생물학자나 행동생물학자, 동물학자들은 하등동물에서의 연구를 인간에 적용시키는 것에 대하여 회의적이거나 훨씬 더 신중한 입장이다. 또 그들은 성선택에 있어서 수컷에게만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지닌 편견을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사고와 언어능력을 가져 훨씬 더 복잡한 인간의 행동을 단일 원인으로 설명하는 환원주의적 접근법이나, 모든 행동을 진화적 '적응'으로 돌려버리는 '진화심리학'의 근본적인 결함을 잘 알고 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너절한" 주장을 담은 이 책은 소위 '명문대학' 출판부(MIT Press)에서 나왔다고 해서 우수한 책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다.
뱀다리. 곧 한국에서도 누군가 이 책을 재빨리 번역 출판하겠지요. 궁금하시더라도 돈주고 사보지 말고, 서점에서 읽거나 도서관에서 빌려보세요.
사이버칼럼리스트 오조영란youngran@chass.utoronto.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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