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의 무지와 오만
무지
가부장제 비판은 유물론적 비판이다
손석춘은 자신의 소설 ‘유령의 사랑’에서 소설 속 맑스의 입을 빌려 모성을 예찬하고 성역할 구분을 자연이 부과한 불변의 영역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는 유뉴스(http://www.unews.co.kr/)와의 인터뷰에서 ‘착한 여자’ 이데올로기를 깨기 위한 운동들을 유한계급의 사치 정도로 폄하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이런 문제들은 ‘먹고 사는 문제’와 무관한 것으로 보이나 보다. 그러나 과연 무관한가?
모성 이데올로기, 성역할 구분, ‘착한 여자’ 이데올로기는 공통적으로 가부장제라는 물적 기반 위에서 그 체제를 옹호ㆍ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들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가부장제 해체를 위한 정치투쟁적 성격을 가지며 反가부장제 투쟁의 중요한 매개가 된다. 이들 이데올로기가 ‘먹고 사는 문제’와 무관한 영역이 되려면 가부장제 비판이 먹고 사는 문제, 즉 유물론과 관계없는 관념의 영역이어야 한다.
그러나 손석춘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가부장제는 철저히 먹고 사는 문제와 결부된 권력관계를 구성하는 체제이며, 우리는 이를 유물론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맑스는 시장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의 매커니즘과 모순을 논리정연하게 밝혀낸 바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부장제 분석을 통해 부딪히는 사실은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에 공백이 있다는 것이다. 즉, 그는 시장의 외부(外部)를 분석하지 않았다. 시장 내에서 노동자는 하나의 상품으로 유통되지만, 정작 이들 노동자가 재생산되는 매커니즘은 ‘자연적인 것’, ‘본능에 의한 것’으로 뭉뚱그려져 있다. 그러나 분명 이 영역을 담당하는 노동 역시 존재하는 바, 그것이 바로 가사노동이다. 가사노동은 피곤에 쩔은 노동자에게 휴식과 회복을 가져다주어서 다음날 제대로 된 상품으로 복귀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며, 다음 세대를 형성할 어린 예비노동자들을 온전한 성인 노동자로 성장하게 만들어준다. 가사노동은 말하자면 자본주의 체제의 중요한 재생산 매커니즘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노동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임금을 받지 않는 무불(無拂)노동이라는 점이다. 가사노동은 시장 밖의 ‘사적’인 영역에 있다는 이유에서 임금노동에서 제외된다. 이에 대한 보수는 단지 임금노동자인 가부장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형태로 대체된다. 즉, 자본주의는 자신의 재생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사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막대한 이윤을 남기는 것이다. 이는 맑스주의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명백한 착취이다.
이러한 착취 시스템(가부장제)을 은폐하고 합리화하는 것은 이 시스템이 자본주의와 별개로 오랜 기간의 역사적 형성과정을 가져왔기 때문이며, 자본주의제와 만나면서 절묘하게 상호 공모체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의 핵심인 가족은 오랜 인류역사의 변동에도 변치 않는 절대적인 지위를 인정받음으로써, 내부의 착취 시스템을 침범할 수 없는 프라이버시로 은폐한다. 대가(임금)를 받지 않고 무한한 사랑과 희생정신을 감수하는 ‘착한 여자’들과 어머니(모성)가 예찬된다. 남성의 역할과 여성의 역할은 자연이 부과한 불변의 격차로 규정되어, 시작에서부터 여성의 역할은 한정된다.
이러한 공모 속에서 오로지 임금 노동자의 해방만을 부르짖는 구좌파적 맑스주의는 여성들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또한 이러한 긴밀한 공모 관계에 무지한 채로 따로 진행되는 반자본주의 운동과 반가부장제 운동은 해방의 과제가 요원할 수 밖에 없다. 손석춘의 맑스주의는 모성 예찬과 성역할 구분을 옹호함으로써 가부장제의 자본주의 재생산 시스템을 옹호하는 것에 불과하다.
오만
진보진영 단결의 기수를 자처하지 말고 反여성주의자임을 인정하라
일본의 맑스주의 페미니스트 우에노 치즈코는 이러한 두 체제의 공모관계를 예리하게 분석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저서에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맺고 있는 긴밀한 관계를 고려하면 부르주아의 아내까지도 프롤레타리아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녀들을 그녀들의 남편들, 아버지들과 동일시하는 것이 매우 부당한 일인 것만은 명백하다. 그녀들은 가부장제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에 대한 무지 속에서 사실상의 옹호자 역할을 하고 있는 손석춘은 예의 인터뷰를 통해 “중산층 여성들의 페미니즘이 역겹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공모관계 속에서 자본주의 모순에는 안주한 채로 가부장제 비판만을 행하는 것은 한계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녀들은 ‘역겹다’고 배척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투쟁에서 연대해야할 동지들이 아니던가? 적어도 진보진영 단결론자 손석춘의 입장에서라면 더 그래야 할텐데 말이다. 중산층은 물론이거니와 부르주아와도 손잡는 주체주의자들이나, 프롤레타리아라기보다 조합권력의 비호 속에 귀족화하고 있는 개량적 노조간부들, 스스로는 절대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무노조 조합원들까지 다 함께 해야할 동지들로 보는 손석춘이 유독 ‘중산층 페미니스트’들은 이토록 격렬히 배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도언론의 기자로서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드러내고 있고, ‘진보’의 이름으로 잘 팔리는 논객인 손석춘은 이번 소설에서 맑스의 대변인 역할까지 자처하고 있다. 맑스주의 본령의 과제를 다시 상기시키고 한국 진보진영에 대한 자기 나름의 입장을 드러내는 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진보진영 단결을 부르짖는 정의로운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지는 말라. 자본주의 모순에 협조ㆍ공모하고 있는 가부장제를 옹호하면서,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혐오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反여성주의자임을 스스로 인정하라.
ps. '무지'를 공격하는 과도한 방식을 쓴 이유는 이렇다. 진보진영의 많은 (남성) 운동가들이 페미니즘에 관한 논쟁을 할 때 보이는 반응이 우선 자신은 잘 모른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고도 할 말 안할 말 다한다. 나는 그들이 맑스주의를 잘 모른다고 전제한 상태로 맑스주의에 대해 그런 논쟁을 하는 것을 본적이 거의 없다. 그러는 경우는 주로 맑스주의에 아주 적대적인 보수반동들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反여성주의자 소리 듣기 싫으면 책 한권이라도 읽는 성의를 보여라. 박살날 것이 망설여지면 제대로 알고 나서 논리적으로 비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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