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지만, 메리 울스톤크래프트의 주장은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는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많습니다. 현재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반박의 여지는 엄청나게
많지요. 하지만 누군들 자기가 속한 시대를 뛰어넘는 영원불변
의 진리를 설파할 수 있겠어요. 울스톤크래프트의 주장은
18세기 후반 영국사회의 여성으로서 짜낼 수 있는 극대치였다고
생각됩니다. 이백년도 더 전의 일인걸요.
18세기의 영국 여성들에게는 정치적 권리라는 게 없었지요.
참정권이야 물론 없었고, 사유 재산을 가질 권리도 직업을
가질 권리도 없었습니다. 여자들이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란 결혼하지 않고 살면서 간호사라던가 가정교사 같은
제한된 직업을 갖는 것 뿐이었죠. 결혼과 동시에 모든 재산및
권리는 남편에 속하게 되었구요.
이런 사회에 대한 분노는 지금에야 당연한 것이지만, 울스톤
크래프트에게는 사회적 매장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페티코트를 입은 마녀"로 불리면서, 사생활에서의 불운 때문에
손가락질 받으면서(그때나 지금이나 여성에게 씌워지는'정절'의
굴레란!)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의 위계질서를 지적해내는
일이 어땠겠어요.
지금의 우리에게 울스톤크래프트의 논리는 비교적 단순하고
지나치게 직선적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항해야
할 대상이 가시적이고 직접적으로 존재하던 시대에는 그에
맞는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을 거에요. 법적, 제도적
억압이 많은 부분 개선된 현재의 상태는 그러한 사람들의
투쟁 때문일 겁니다.
본질적으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고, 능력이나 인격 따위는
갖추지 못한 철없는 존재로 여겨지던 인식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여성에게도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주장
해야 했겠지요. 그녀가 전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다고
주장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껏해야 귀여움의 대상쯤으로
머무르던 여성들에게,남성들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일깨우고 싶었던 거겠죠. '남성적인' 여성이란
괴물처럼 여겨지던 시대니까요.
여성의 가사활동을 매춘으로 규정했다는 말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을 것 같군요. 울스톤크래프트가 가사활동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여성들에게
전업주부란 하나의 '직종'이 아니라 의무였습니다. 결혼과
동시에 당연히 부여받게 되는 일종의 의존적인 위치였죠.
결혼은 당시의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으므로, 여성들은 예쁘게 치장하고 수박 겉핥기 교양을
쌓으면서 그런 의존적 관계 속으로 들어가기를 꿈꾸었습니다.
울스톤크래프트가 비판한 것은 그러한 의존 상태였습니다.
사회가 부여하는 여성성의 굴레 속에서 의식없는 인형처럼
결혼을 꿈꾸고, 오직 그에 의해 부여받는 아내의 위치, 주부의
위치에서 평생을 자각없이 보내는 것, 자신의 웃음과 미모를
팔아 사회적 안정을 얻는 것을 매춘과 같다고 생각한 거겠죠.
말씀대로 원전을 한번 인용해 볼까요. 흠, 제가 그냥 옮기는
거라 번역이 정확하다고는 못하겠지만요.
..나와 같은 성을 가진 이들은, 내가 그들의 매력적인
우아함에 대해 아첨하거나 그들이 혼자서는 지낼 수
없는 영원한 아기같은 상태에 있는 것처럼 취급하거나
하지 않는 대신, 그들을 이성적인 존재로 대한다 해도
나를 용서할 것이다. 나는 여성들이 몸과 마음 모두에서
힘을 갖기 위해 노력하도록 설득할 것이다. 또한
부드러운 말투, 감수성, 섬세한 감정, 정제된 취향
등은 모두 연약함과 같은 말이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그저 동정의 대상, 일종의 사랑의 대상일 뿐이며
곧 경멸의 대상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도록 설득할 것이다.
네,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식적인
주장, 상식적인 분노가 비정상적인 것으로 취급받고 질타
당해야 하는 시대였으니까요. 실제로 울스톤크래프트는
그리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개인적 불운과 고난을
실컷 겪고 나서, (비교적) 자신을 이해해 주었던 급진적
사상가를 만나 결혼했지만 그 시절도 육개월만에 끝나고
말았으니까요. 그 죽음의 댓가로 메리 셸리가 태어났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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